'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 해라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 해라

[ 라떼는말이야 ] ① 증경총회장 김순권 목사

김순권 목사
2024년 01월 24일(수) 16:10
1968년 최전방 12사단 52연대에서 군종목사 시절 가족과 함께 한 증경총회장 김순권 목사.
군종목사 중위로 임관해 첫 부임한 부대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에 주둔했던 육군 제12사단 52연대였다. 지금은 교통이 좋아져 서울에서 3시간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편리해졌지만 그때는 8시간 이상 소요되었고, 소양강댐이 있기 전이라 비포장도로에 검문소가 여러 곳에 있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정도로 내왕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1년에 겨우 한 번 정도만 휴가를 받아 서울에 오곤 했었다. 향로봉 아래 있는 우리 부대는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고 군인들도 매우 힘든 국방의 의무를 해내는 곳이었다. 나는 이 부대 근무를 평생 잊을 수 없다. 1965년 11월 27일 육군 보병학교에서 육군 중위(군목)로 임관되어 12사단 52연대에서 1969년 4월 주월남 맹호부대 군목(대위)으로 파병되기까지 4년 5개월을 보람있고 즐거운 군생활을 경험하였다.

그 당시 군 장병들은 보충대(춘천)에서 이곳으로 명령을 받고 오면 그들끼리 했던 말이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가면서 먼지를 받으면서 사단 본부가 있던 원통에 내리기까지 남기는 말은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여라"였다. 나도 그런 심정으로 사단장(원통)에게 신고를 하고 원통에서도 더 북쪽에 주둔한 천도리 52연대로 한 시간을 트럭을 더 타고 가서 연대장에게 또 신고를 하고 군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산들은 높고 하늘만 뚫린 듯 외롭고 모든 것이 서툴렀다. 그때도 군선교는 전방을 지키는 장병들 방문과 초소와 대대는 물론 중대단위로 순회예배 인도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보람이었다. 혼자 숙소에 지내는 추운 밤은 정말 외로웠다.

나는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1967년 1월 17일 결혼을 하였다. 신혼살림은 정말 행복했다. 아내는 이화여대 사범대학 화학과를 졸업하여 중고등학교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에 인제군 교육청에 문의한 결과 인제군 어디에서나 교사로 발령받을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는 거리가 멀어 힘들고 부대 옆에 있는 서화국민(초등)학교를 지원하여 높은 호봉으로 발령받아 근무하였다.

천도리(서화면)는 군인마을이라 좋았고 마침 우리 부대는 최전방 부대인지라 학교도 최전방 검문소 안에 위치해 있었기에 아내 교사 월급은 최전방 근무수당까지 수령하였다. 중위 월급보다 훨씬 아내가 더 많이 수령하여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 대위로 2년 만에 진급하고 그곳 강원도에서 젊은 군목으로 대대단위 교회를 세웠다. 서울에 있는 교회들의 협조를 받아 대대단위 신학생 장병들을 선발하여 대대장들의 협력으로 최전방의 각초소 장병들을 돌보는데 군종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지휘관들의 좋은 호응도 받았다.

연대장과 대대장들이 '군종활동은 군장병들의 신앙 전력이야말로 군정신 함양에 큰 힘'이라는 인정을 받아 중대단위로도 군종사병을 두게 되었고 나는 군 제자화운동에 큰 기대를 안게 되었다. 그 결과로 나중 소령으로 진급 후에는 미국 컬럼비아대 선교대학원에 군 위탁생으로 선발되어 2년간 석사학위로 '군선교 그룹 제자화 운동'의 논문을 쓴 것이다.

미국 유학 중 중령으로 진급되는 혜택도 받았다. 나는 처음엔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였으나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원통) 천도리는 잊을 수 없는 내 일생의 추억을 만들어 준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 큰아들 형일을 얻었고, 그의 나이 올해로 56세이다. 나는 군목시절을 추억한다. 멋진 보람이었다. 그곳에서 월남으로 떠났다. 다음 주에는 월남 파병 시절인 맹호부대 얘기를 계속할까 한다.

김순권 목사 /증경총회장·대한성서공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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