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놀라지 않는가

왜 놀라지 않는가

[ 가정예배 ] 2024년 2월 13일 드리는 가정예배

이선규 목사
2024년 02월 13일(화) 00:10

이선규 목사

▶본문 : 시편 139편 7절

▶찬송 : 552장



놀라움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앙꼬 없는 찐빵은 찐빵이 아니듯, 놀라움이 사라진 신앙은 더 이상 맛이 나지 않는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모습이 기묘하다고 했다. "나를 지으심이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14절)" 새 번역은 이 부분을 '놀랍다'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랍다고 여길 수 있는 인생이 몇이나 될까? 그러고 보면 신앙은 가는 이가 적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우리는 과연 자신에 대해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기이하다고, 놀랍다고 여기고 있을까? 평소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그런 쪽으로 신경을 집중할 때에 비로소 생각을 하고 아 과연 그렇구나 하며 여기게 된다. 설교를 작성할 때에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자판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손에 마디가 있어야 가능하다. 아 이 마디! 손가락에 마디가 없다면 어떻게 현란하게 자판을 자유자재로 칠 수가 있겠는가? 설교를 작성할 때 필자는 습관적으로 커피 잔을 옆에 놓고 친다.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다가도 생각의 흐름이 이어지지 않을 때면 내 손은 커피 잔으로 향한다. 산만한 정신을 한 데로 모으는데 일조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내가 사용해야만 하는 나의 신체의 일부는 손가락 마디다. 이 마디가 없다면 커피 잔을 잡지도, 커피도 마실 수도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손가락 마디인가! 그런데 평소에 왜 이런 기적적인 손가락 마디를 놀라워하지도 감사하지도 않는 것일까?

'우리들은 기적으로 되어 있다'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카즈키는 그가 어렸을 때에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를 떠나야 했던 어머니를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이 존재할 가능성을 계산해 보았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어머니가 할머니한테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할머니가 증조할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면...이런 식으로 계속 생각해 본다면 제가 태어날 확률은 기적의 기적입니다." 그러고 나서 벌떡 일어나 진심 어린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큰절을 한다. "감사합니다."

드라마를 다 본 후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숲 속을 걷고 싶다는 느낌이었다. 평소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교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들을 걷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생각이 달랐다. 좀 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건성으로 훑어봤던 나무나 바위, 흙, 그리고 저 멀리 하늘을 찬찬히 보면서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다시 질문을 하자. 나는 왜 놀라지 않는가. 어디 손가락 마디뿐인가. 매일 먹는 음식을 소화시키는 소화 기능도 생각해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만약 내 위와 장이 소화시키지 못한다면 맛난 음식은 더 이상 맛나지 않는다. 무엇이 놀라움을 방해하는가.



오늘의 기도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에 감사하게 하시고 놀라게 해 주옵소서. 잠자리에 들 때에도 그렇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선규 목사/황항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