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1월 1~6일

[가정예배]1월 1~6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7년 12월 29일(금) 13:55

월-처음처럼
본문 : 계 2:1~7
찬송 : 463장

내년에 교회 비전이 '처음처럼'이라 했더니 많은 성도들이 "와~"하고 웃는다.
목사지만 그들이 무엇을 연상하는지 그쯤은 잘 안다. 그러나 나의 뜻은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처음 받은 은혜, 구원의 감동과 감격과 기쁨을, 그리고 그때의 결심과 헌신과 열심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첫 입학, 새내기 대학생, 첫 직장의 출근, 첫사랑, 결혼식장의 서약, 첫 아이의 출생 등을 기억해 보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렘의 순간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그 처음 마음을 지키며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과 영성과 열심이 처음처럼 주욱 이어갔으면, 혹여 잃었다면 다시 회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돌이켜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기쁨, 늦깎이 신학교 입학, 신학생으로서 교회 개척과 목사 안수의 그 벅찬 감격과 감동, 작지만 예배당의 건축은 아직도 여전히 가슴 뛰는 순간들이었다.
아마도 에베소 교회가 그러한 감동과 감격으로 뜨거운 교회였나 보다. 그래서 주님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행위와 수고, 즉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인내하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 한마디로 열심 있는 교회였단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교회가 책망을 들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 사랑이란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 열심과 충성이리라 여겨지는데, 참으로 두려운 것은, 그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면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이다.
시대를 탓하거나 환경을 나무랄 것 없다. 오늘날 이토록 그 말씀 앞에 부끄럽고 두려운 것은 모두 게으름과 타성에 젖어버린 나의 탓이라 여겨진다. 그러니 마음을 다잡고 '처음처럼'을 외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먹은 마음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말인데, 말이 쉽지, 그게 그렇게 되던가? 수없이 넘어지고 포기하고 뒤돌아보는 것 아닌가? 그래서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뜻의 초심불망(初心不忘)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소망한다. 이왕지사 넘어지고 뒷걸음쳤다면 이제는 '초심불망'으로 '처음처럼' 첫 사랑, 첫 믿음, 첫 소명, 처음의 뜨거운 가슴과 열심을 회복하여 2018년은 다시금 주님의 칭찬받는 해가 되자고.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새해에는 첫사랑을 회복하게 하소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과 감사를 그리고 소명을 회복하여 뜨거운 열정과 충성으로 사명 감당케 하소서. 주님의 칭찬받는 2018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형흠 목사
은석교회


화-흔들림은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본문 : 엡 4:1~6, 11~16
찬송 : 204장

공중그네 무용수가 공중 날기를 가장 잘하는 방법은 '그저 팔을 뻗기만 하면 된다'라고 한다. 높은 곳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그네에서의 최악의 실수는 나를 붙잡아 주려는 사람을 내가 잡으려고 달려드는 것이라고 한다. 손을 놓으면 죽을 것 같지만 내가 잡고 있는 것에서 손을 떼야 이쪽에서부터 저쪽으로 건너갈 수가 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네처럼 흔들림이 있어도 결코 실패하지 않고 잘 건너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흔들림은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시고 지키는 사람이다.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와 모든 선지자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삭개오, 막달라 마리아도 부름받은 사람이다. 부름 받은 형식과 시기와 장소는 다르지만 부름 받은 사실은 동일하다.
흔들림은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첫째, 겸손히 행해야 한다. 상황과 환경 및 인간관계를 떠나 스스로 속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바로 살피는 데서 생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둘째, 온유하게 행해야 한다. 셋째, 오래 참아야 한다. 어떤 환경과 경험에도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견딘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부당한 대우, 조롱을 당하여도 오래 참고 견딘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한다. 넷째,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주신 연합에 힘써야 한다. 평안은 헬라어로 에이레네이다.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의 번역어이다. 매는 줄은 성도와 성도 사이를 묶어 주고 운명공동체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평안은 이질적인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끈(매는 줄)이다. 이러한 연합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이고,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는데 이것은 지속과 반복적인 노력을 각자가 해야 함을 의미한다. 결국 흔들림은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평안의 매는 줄'로 교회의 한 몸과 하나 됨을 이루어내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소명의 사람이다. 온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온전히 영접함으로 부름을 받아 흔들림은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무엇이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도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삶을 살자.

오늘의 기도
흔들림은 있어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신 자리에서 겸손하게 하시고 온유하게 하시고, 오래참게하시고 평안함으로 하나님의 사람들과 연합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재학 목사
광명교회


수-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본문 : 삼상 13:11~14
찬송 : 585장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 '합'이라는 한자를 파자해 보면 그 뜻을 아주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合(합)'자를 파자해 보면, 사람 '人'자, 한 '一(일)'자, 입 '口(구)'자가 된다. 사람이 하나의 입을 가진다는 뜻이다. 바로 합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의 입을 가지는 사람을 뜻한다.
바쁘고 정신이 없을 때에도, 지치고 피곤할 때에도, 억울한 일을 만났을 때도, 큰 시련을 만났을 때도, 일이 꼬여 뜻대로 안될 때도, 병들었을 때도, 사고를 당했을 때도, 뿐만 아니라 일이 잘 풀리고 형통할 때도, 기쁠 때도, 즐거울 때도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입을 가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다윗은 평생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입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다. 한 입에서 단물과 쓴물을, 그리고 찬송과 저주를 함께 내지 않았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 또 사울을 피해 광야로 도망 다닐 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피했다.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었다. 이와 반대로 애굽 땅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가? 그들은 고된 노동으로 늘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우리를 왜 이대로 내버려두십니까?" 입을 열어 탄식하고 한숨지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 열린 입을 채워주셨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에서 건져내주셨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하나의 입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체험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복으로 여기면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면 그만이다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하나님 앞에 하나의 입을 크게 벌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채웠기에 점점 흥할 수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기쁨, 축복, 평강을 맛 본 사람들은 그 맛을 알기에 입을 더 크게 벌리고, 더 갈망하게 된다.
어떤 일에서든지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의 입을 크게 열어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와 평강의 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일을 만나든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입을 크게 열어, 하나님께서 채우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장덕 목사
도원교회


목-아름다운 정리
본문 : 레 24:1~4
찬송 : 554장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한 일 중의 하나는 자신이 가야할 길과, 지금 가고 있는 길이 같을 때이다. 우리의 인생길이 기쁨과 만족과 감사가 되도록, 더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올바른 선택과 행함이 이루어져야 한다. 2018년이라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사건과 사연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시간이 바뀌었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가는 여정에 있으니 언제나 부끄럽지 않고 칭찬 받도록 주님 만날 준비를 잘 해야한다.
정리할 일들을 정리하고 새 은혜를 받을 그릇들을 준비해야 한다.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버리고, 담아야 할 것이 있다면 서둘러 담아야 한다. 풀어야할 매듭이 있다면 풀고, 용서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할 일이 있다면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준비를 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막 안에는 24시간 등불이 켜져 있어야 했다. 성막은 오늘의 교회를 상징한다. 그 성막 안에 등불이 꺼지면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백성들과 하나님이 항상 영적으로 교통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상징물이었다. 그 등불을 켜는 기름은 순결한 감람유여야 했다.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다. 흔한 나무지만 값싼 나무도 아니다. 하나님의 성소를 밝히는 기름은 오직 감람나무 열매를 찧어서 짜낸 순결한 감람유여야 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밝히는 등잔불 기름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감람유는 열매를 으깨고 빻아서 기름을 짜야 나온다. 그와 같이 나 자신을 으깨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야 한 방울 기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름으로 주님의 교회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내가 기름이고 내가 심지다. 교회와 세상을 둘러봐도 등잔은 많지만 기름은 적다. 등잔이 되려만 하지 말고 기름이 되려 하자. 교회를 섬기는 자세나 마음이 순결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또한 등잔불이 꺼지면 안 된다. 참된 진리의 빛은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유혹의 한복판에서라도 항상 꺼지지 않고 밝은 빛을 발하는 법이다. 내 심령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 꺼지면 영혼은 좌초하게 된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교회가 활활 타는 등불이 되자.
우리의 영혼과 삶도 날마다 다듬고 돌아보아야 한다. "너는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씀을 반복하신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또 이 세상 앞에서 사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이다. 하나님 앞에서 준비가 아름다우면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과정과 열매를 맺게 된다. 내 자신을 빻고 찧어서 만든 순결한 감람유가 되어서, 계속 꺼지지 않는 등불을 켜고 항상 등잔불을 준비하는 자들로 하나님 앞에 서자.

오늘의 기도
아름다운 준비를 통해 보다 더 풍성한 삶, 더 충성스러운 새해, 더 진리의 환한 빛을 비추는 순결한 감람유의 등불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태윤 목사
번암교회


금-내게 주신 모든 은혜
본문 : 시 116:1~19
찬송 : 301장

하나님의 은혜는 몇 가지로 한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절박한 위기에 빠졌을 때의 환난과 슬픔의 혹독한 고통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모든 은혜를 말하고 있다. 우리도 한 해를 보내면서 많이 아팠고 힘든 삶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첫째, 기도 응답의 은혜.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매우 고통스럽고, 환난을 당한 절박한 모습이다. 예상치 않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더라도 이기고 극복하기위하여 참된 구원을 얻을 방법은 오직 기도밖에 없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의 소리에 응답하셨으므로 평생 기도하는 삶을 살겠다고 서원한다.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한 기도로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셨으며 욥은 간절한 기도로 환난을 이겼고 다윗은 침상을 띄우는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기도의 특권을 얻은 자들이다. 어려운 일들을 경험할 때나 곤고하고, 답답하고, 힘들 때 이겨낼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둘째, 전인적 구원의 은혜. 사망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전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탄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며 풍파 속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곤고한데서, 질병에서, 모든 환난과 고통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전인적 구원이다. 전인적 구원의 은혜의 보답은 그리스도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최고로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만민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하며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핍박도 감수하는 담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계속적인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 분별의 지혜와 결단의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위하여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구원의 은혜 받은 자가 살아가는 동안 복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셋째, 모든 은혜를 찬양. 내게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여 찬송할 이유가 넘친다. 내 모든 죄 사하시므로 찬송, 내 모든 병을 고쳐 주셔서 찬송, 내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셨으므로 찬송, 구원받은 자들은 찬송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찬송을 드린다. 구원의 감사를 하나님께 찬송으로 표현하는 욥은 고난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을 찬송했으며, 다윗 역시 마찬가지로 환난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아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우리들의 고난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계속 살피시며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는 능력의 주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자.

오늘의 기도
내게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경희 목사
밀알교회


토-야곱이 에서를 이기게 하라
본문 : 창 27:1~40
찬송 : 459장

야곱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기도를 가로챈다. 이삭의 축복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가문의 후계자를 세우는 과정이다. 결국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아브라함과 이삭 가문의 후계자가 된 것인데, 이삭은 속은 걸 알고 난 후에도 야곱을 축복하며 보낸다(창 28:1). 야곱의 행동을 인정한 셈이다. 왜일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2:18) 갈라디아서 3장 16절은 이 '씨'가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한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 가문을 통해 천하 만민을 구원할 메시야가 온다는 뜻이다. 당연하게, 메시야가 탄생할 가문은 한 가문일 수밖에 없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자였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되지만,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다. 물론 별 일이 없다면 장남이 선택될 게 분명했다. 그것이 '장자의 권리(명분)'이다. 문제는 에서가 이 특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심지어 그 권리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릴 만큼 하찮게 여겼다(창 25:34). 그런 에서를 히브리서 12장 16절은 망령된 자라고 표현한다. '속된 사람, 세속적인 사람'이란 뜻이다. 에서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려는지,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다. 자기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었다. 자기가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통로'가 되고 싶었다. 그 간절한 열망 때문에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받으려 했던 것이다. 이삭이 자기가 속은 줄 알면서도 야곱의 행동을 그대로 인정해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나님 일에는 전혀 관심 없는 장남 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싶어 하는 차남 야곱이 결국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에서와 야곱이 있다.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욕망과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열망, 이 둘이 다 우리 속에 있다. 우리의 내면에서 에서와 야곱이 싸운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에서는 누가 이기고 있는가? 에서인가, 야곱인가? 내 욕망대로 사는 나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나인가? 내 안에서 야곱이 에서를 누를 때, 그런 나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 안에 갈등이 있습니다. 힘써 주의 일을 하고 싶은 나와 편안하게 즐기며 살고 싶은 나, 이 둘이 싸웁니다. 날마다 주의 은혜를 힘입어 제 안에서 언제나 야곱이 에서를 누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경훈 목사
큰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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