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19일

5월 14~19일

[ 가정예배 ]

2018년 05월 11일(금) 08:00
월-남자의 기도
본문 : 딤전 2:8
찬송 : 369장

고대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남자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강함이다. 남자는 거대한 자연과 맞서 가족을 지키고 무시무시한 괴물을 무찌르며 집단을 보호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렇게 지성을 강조했던 르네상스시대에도 남자는 힘과 용맹을 떨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남성상은 우리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남자의 상징은 강함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는 강하고, 독립적이고,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남자는 약함을 보여서 안되었다. 이것이 고대사회로부터 이어져온 남성상이다.
 
이런 남성상은 자연스럽게 남자를 신앙의 세계와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신앙생활은 연약한 여성이 하는 것으로 여겼다. 남자들은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으라고 허세를 부렸다. 특히 기도하는 일에서 아주 소극적이 되었다. 남자가 무슨 기도를 하냐고 기도를 힘없는 여자나 심신이 허약한 사람이 하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이것은 정상적인 것일까? 정말 남성에게 기도는 필요하지 않는 것일까? 본문은 도리어 남성들에게 기도를 권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성경을 보면 기도하라는 권면과 명령이 많이 나오는데 명시적으로 여자에게 기도하라는 명령은 없다. 그런데 남자에게는 기도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무슨 의미인가? 도리어 남성들에게 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작 기도가 필요한 것은 남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들에게 그 신화적인 남성상에서 벗어나서 기도하라고 권하고 있다. 하나님은 남성들이 신화의 길을 가지 않고 신앙의 길을 가길 원하신다. 남자가 기도해야 하며 남자가 기도할 때 가정에서의 영적 권위도 세워진다.

가정에서 남자의 권위는 분노와 다툼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역정을 낸다고 경제력을 쥐고 있다고 힘이 있다고 영적 권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도리어 남자는 분노와 다툼을 버려야 한다. 분노와 다툼은 남자를 추하게 한다. 남자의 기도가 그를 그 가정의 영적인 가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한다. 남자가 기도해야 한다. 부인의 사랑과 자녀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하면 가정에서 제대로 된 영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 그 권위로 가정을 돌보고 자녀를 축복하고 권면하고 부인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남자의 기도로 되는 것이다. 남자의 기도가 영적 권위를 만든다. 지금은 바빠서 좀 더 나이 들면…. 아니다. 지금부터 해야 한다. 남자들의 기도가 더 뜨거워지고 간절해져야 한다. 모든 남성들이 기도의 문을 열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자신의 힘이 아닌 주님께 의지해 기도의 자리에든 나아가게 하소서. 분노와 다툼을 버리고 기도함으로써 가정에서 영적 권위를 갖게 하소서. 기도로 얻은 영적 권위로 가정을 돌보고 자녀들을 축복하고 권면하고 부인을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지태 목사
평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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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랑의 공동체
본문 : 고전 12:12~31
찬송 : 559장

얼마 전 경남 합천에 있는 오두막공동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대표인 이재영 장로와 최영희 권사를 만나고 '상처 입은 자들과 일구는 복음의 공동체'라는 부제가 달린 책 한권을 얻었다. 갈 곳없는 재소자들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상처입은 자들과 장애우들과 또 그 아픔을 담고 있는 부모들이 함께 어우러져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는 모습을 진솔하게 적어놓았다. "'왜 이런 일을 하세요?'라고 사람들이 묻는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살다보니 이유라는 것이 사라졌다. 함께 사는 데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까닭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니까 함께 사는 것뿐이다.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하나를 붙들고 외진 산골에 머무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단순한 순종과 단순한 생활이 낳는 단순한 기쁨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다."

가정, 교회, 내가 속한 공동체가 이런 마음을 갖자. 그리스도의 몸은 어떤 지체이며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첫째로 모두 다르니 모두 귀하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그 하나님의 권속들 모두가 생김새부터 성격, 취미, 생각들이 다르니 다 귀하다. 그러나 서로가 귀하다고 느껴지기까지는 수많은 시행과 착오와 연단을 겪으면서 서로 어우러진다. 무엇을 가지고 있음으로써가 아닌 생명의 귀함으로 서로를 대접할 때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를 환대하신 속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다.
 
둘째로 한 지체니 함께 받는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가장 소망이 되는 것은 이 땅에서 함께 고통받은 교회는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좇아 부활의 영광과 즐거움에 동참할 것이란 사실이다. 같은 지체의 고통이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는 지체는 한 지체가 아니다. 또한 한 지체의 영광이 자기의 영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한 지체가 아니다. 우리에게 뿌리 내리고 있는 무관심, 시기, 질투를 성령의 보습으로 갈아 엎어버리자.

셋째로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이다. 우리의 몸이 분쟁이 없이 여러 지체가 서로 돌보기에 우리의 몸이 건강한 것처럼,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나 어느 공동체나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31절을 보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보이리라고 하면서 13장 사랑장으로 넘어간다. 이 사랑은 은사 중에서도 제일 큰 은사이다. 이 은사는 모든 은사의 기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흥미롭고, 감동적이고 결국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된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그리스도 안의 한 몸임을 깊이 묵상하며 가족과 교회와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지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주미 목사
새들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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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
본문 : 잠 22:6
찬송 : 559장

한국인의 자녀 교육열은 대단하다. 그러나 교육의 양보다 교육의 방향성이 중요하다. 교육의 방향성이 잘못되면, 그 교육의 양은 오히려 인간성을 파괴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마땅히 행할 길,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첫째,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을 가르쳐야 한다. 인격은 성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격과 성품은 거룩한 습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품은 오랜 교육을 통해서 형성된다. 사회는 성품과 인격 교육보다는 기능과 기술에 더 집중한다. 요즘에 어떤 항공회사 가족들의 갑질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것은 한 가정 안에서 성품과 인격 교육이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보다 먼저 인격을 갖춘 인간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경외하는 말 속에는 공경과 두려움이 함께 들어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정직한 두려움이 없기에 사람들은 악해지고, 믿는 자들에게서 정직하고 바른 믿음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만 하면 안된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람다움, 인격과 성품, 따뜻함과 아름다운 마음씨보다 돈, 성공, 출세를 강조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보다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우상을 자녀에게 심어준 우리들이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깨닫고,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물려주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르치되,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주일 성수와 십일조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 주일 성수는 내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십일조는 내가 가진 모든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시간, 물질,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훨씬 더 풍성한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어릴 때일수록 좋은 신앙의 교육과 습관을 들여놓으면, 평생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 오늘 내 자녀의 영혼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 오늘도 우리 자녀들의 영혼 속에는 부모인 나를 통해서 인생의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오늘의 기도
부모들이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신앙의 길을 가르치게 하옵소서. 그래서 평생 하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양수 목사
광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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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학대 받을수록 더욱 번성
본문 : 출 1:8~14
찬송 : 400장
 
이스라엘 역사의 특이한 현상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쩌면 복음의 역사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백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가 노동 학대를 통해 괴롭힌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번성하고 퍼져 나가게 된다. 애굽의 두 얼굴이고 세상의 두 얼굴이다.
 
세상이란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왜 세상을 낙원으로 만드시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가 존재하게 하실까? 인간이란 안락과 기쁨을 오래 동안 유지할 만큼의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그러기에 주어진 현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와 개입으로 주어진 것이다. 형통만 주어지면 영적인 잠을 잔다. 그래서 가끔은 고난을 준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인간의 못남과 실패와 고통과 현실의 열악함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가 더 크다고 믿는 것이다.
 
조건과 자격이 없는데도 부요한 구원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이고 복음이다. 죄인일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가 주어졌다. 우리의 무시와 거부를 뛰어넘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지 우리가 매달려 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성립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시작만 은혜이고 과정과 결과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의 내용과 결과를 만든다. 하나님이 우리를 놓지 않고 사랑의 끈으로 점점 강력하게 동여매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못남과 약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결과 맺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동원된 인생과 신앙으로 우리의 삶을 이루어내시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좋은 결과의 근거요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실패는 실패대로, 성공은 성공대로, 형통은 형통대로, 고난은 고난대로 모두 우리의 신앙내용을 풍성하게 펼치는 신앙적 재료이다. 우리는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긴 자가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걸맞는 신앙의 내용과 목적으로 채워 성숙한 신앙 인격에 도달한 간증이 많아야 세상이 우리를 무서워 한다. 그렇지 않고 세상 것으로만 채우려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좌절과 고난으로 우리의 신앙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목표를 수정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할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오늘의 기도
세상은 은혜의 현장이기도 하고 고난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하게 순종하면서 은혜 속에서 영적 풍요를 경험하고 고난 속에서 흐트러진 신앙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바로 잡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끄러움이 없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의성 목사
맑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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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아버지의 사랑
본문 : 눅 15:11~24
찬송 : 579장

교육학적으로 부모에게는 4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첫째, 권위적인 부모이다. 억압적인 교육방침을 갖고 있다. 둘째, 허용적인 부모이다. 방임적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대리만족형 부모이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이나 야망을 자녀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부모이다. 넷째는 감정 코치형의 부모이다. 관계적 부모형 또는 멘토형 부모이다. 마지막 타입이 이상적인 부모의 유형이라고 한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의 비유가 있다. 첫째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요,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요, 셋째는 탕자의 비유로서 잃은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의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셨다.
 
첫째로 아버지의 사랑은 '내어줌'이 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한다.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고약한 아들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는 아버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의 상식으로는 어수룩한 아버지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내어줌'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값비싼 선물을 하는 것은 아깝지 않다. 이것이 사랑이다.
 
두 번째 아버지의 사랑은 '기다림'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로 떠난 아들을 기다린다. 성공하고 출세해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니다. 어쩌면 여전히 탕자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기다림 자체가 고통이요, 어리석음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 먼 거리에 있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달려 나가 맞이했다. 비록 거지의 모습이요, 실패자의 모습이었지만 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서 아들에게 입맞추고 영접한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아버지의 '용서'이다. 탕자를 아들로 영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이렇듯 빠를 수가 없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 아들의 과거도 묻지 않고, 과거의 행동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를 보고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요,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하고 기다린 것이다.
 
기쁨 속에 또 하나의 소원이 있다. 아들이 모든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죄송스런 마음과 죄책감을 다 떨쳐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 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의 부모님께도 효를 다하는 가정이 되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만준 목사
덕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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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예수님 마음으로 효도하라
본문 : 요 19:23~27
찬송 : 579장
 
5월이 되면 더욱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난다. 더욱 허리가 굽으신 모습이 더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으로 인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본문은 예수님 지상명령의 결정에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는 구속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최후의 십자가 현장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열두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현장까지 따라갔던 요한의 신앙을 볼 수 있다. 이 요한은 경건한 아버지 세베대의 가르침과 헌신적인 어머니 살로메의 신앙생활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저도 어머니의 기도로 목회자로 살아가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정에서의 어머니의 기도는 가장 중요하며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첫째, 어머니의 사랑인식.
 
마리아는 해산하자마자 핏덩이 아기예수를 안고 애굽으로 급히 피난을 가야했다. 가난한 목수의 아내로 아들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지혜롭고 건강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십자가 밑에서 통곡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끝까지 아들 예수를 사랑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을 깊이 인식했다.
 
둘째, 언약성취의 순종.
 
요한은 십자가 현장에서 벌어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현장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십자가의 자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순종의 자리였다는 사실이 요한에게 깊이 깨달아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일평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셋째, 부모 효도의 모범.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중에 통곡하시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면서 옆에 서 있는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그래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주님의 마지막 유언에 응답하여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처럼 평생 모셨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에 따르는 일이고 인간의 근본도리요 축복받는 길이다. 돌아가신 후 귀신이 되어 제삿날에 부모님이 찾아오시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제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내가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면, 자녀들도 본받아 이 험한 세상에 어른들을 공경하며 약한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오늘의 기도
이땅에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셔서 진정 사랑을 배우고 사랑하면서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낳아주신 부모님을 공경하고 형제를 아끼고 섬기며 살아가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정우 목사
한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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