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문제를 보는 교회의 시각?

난민 문제를 보는 교회의 시각?

[ 시론 ]

최영일 목사
2018년 06월 28일(목) 08:22
난민 문제를 보는 교회의 시각?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마태복음2장 13.15a)

560여 명의 예멘난민신청자들의 무비자 입국과 정부의 뒤늦은 대처로 제주도민과 국민들은 불안과 염려, 사회적 비용의 문제를 거론하며 수용과 거부의 찬반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 제주예멘난민신청자(G1)들 문제에 대한 논점은 혐오와 거부 혹은 수용의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국가들마다 국익의 관점에서 국민의 먹거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해외 투자와 수주, 비즈니스 외교관계와 상호주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시절이다. 무비자 협정도 그러한 국익추구의 산물이다. 결국 오늘날 문을 닫은 상태에서 우리끼리만 안온히 살 수 있는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난민의 입국을 피할 수 없는 국면에서 난민의 입국으로 인해 초래될 결과들에 대한 최선의 선택지에 대해 정부당국과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색해야 할 때이다.

교회 역시 소극적이고 비생산적이며 일종의 회피의 담론인 혐오의 담론을 버리고 합리적이고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선교전략을 세울 때다. 제주예멘 난민신청자 이슈는 가속화된 이주의 시대에 국가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역량과 대안을 모색할 계기가 될 것이다. 국가는 다양한 정체성의 난민신청자 유입에 대비해 유효하고 안정된 수용, 심사, 귀환 혹은 정착과 사회통합 등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고 규모와 상황에 따른 유연하고 다층적인 정책적 입장을 수립해야할 것이다. 결국 예멘인 560여명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사회적 비용을 소진하게 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혐오나 배제적 정책은 추후 심사과정을 통해 난민인정자(F2)나 인도적 체류허가자(G1)로 인정받고 정착하기위해 우리 시민사회로 진입하기도 전에 그들의 마음에 생채기와 분노 그리고 사회해체적 선택지를 제공할 뿐이다. 사회통합은 요원해진다.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는 예멘인들은 이미 상처받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오가는 모든 이야기들을 SNS를 통해 듣고 느끼고 있었다. 필자는 그들과의 SNS 대화 속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이는 크리스천들이 내미는 환대의 손길에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의 실존의 어떠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해받고 싶어 한다. 아니 오해받고 싶지 않다고 깊은 슬픔 가운데 호소하고 있었다.

우리사회에는 이미 이해받지 못하고 고립된 사회심리적 공간에 갇힌 이들이 많다. 난민들을 향한 또 다른 비가시적인 사회적 게토를 재생산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아무 증거나 판단의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가 미리 판단할 이유가 없다. 특별히 교회는 더욱 그렇다. 박해받는 자들의 마지막 도피처이기 때문이다. '외로운 늑대'는 본성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압박과 배제를 통해 형성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차별과 배제와 혐오가 난민이나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을 외로운 늑대로 전락시키고 고립시키며 결국 우리를 죽이는 무서운 부메랑이다. 그래서 환대와 수용의 정책이 더욱 필요하다. 이것이 난민들로 하여금 더욱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이자 조화로운 정체성을 확립한 주민이자 시민으로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수용성이 모든 난민들의 무조건적, 온정주의적 인정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법적인 절차에 따라 난민신청자(G1)로서 서류심사, 인터뷰심사를 거쳐 난민인정(F-2) 혹은 난민 불허, 인도적체류허가자(G1)로 최종 판결 받는다. 판단의 책임은 조약과 난민법적 절차에 따른 심사과정과 국제적인 정보당국간의 교류와 공조 등을 통해 고도화된 난민심사 당국에 맡기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법무부야말로 난민 수용국 중 매우 보수적인 심사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동일한 사건이나 정체성으로 타국에서는 난민인정을 받은 사유조차도 우리나라에서는 불허되는 경우들이 빈번하다. 난민인정자(F2-4)라 해도 추후 문제가 발견되면 난민인정을 철회할 수 있다.

그러니 판단을 뒤로하고 예멘 난민신청자들 모두가 집을 잃고 피난처를 간절히 찾는 아기 예수님의 가족이자 현대사속 우리의 자화상이었음을 자각해야 할 때다. 나아가 예수님의 환대를 실천할 때다. 희생과 인권과 관용보다는 불안과 근거 없는 소문과 이익과 무한한 안전주의에 기반을 둔 판단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민사회 한 가운데서 주님의 영성과 사랑의 삶을 재현해낼 때다. 그렇게 평화를 구축하는 교회로 서고 혐오와 배제, 물질주의와 반인권에 맞서야 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난민과 이주민선교는 실현된다. 환대야말로 침묵의 몸짓이지만 가장 우렁찬 설교요 타자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강력한 힘이다. 혐오는 평화를 깨트리고 분노를 재생산하지만 몸을 내어주는 환대는 반드시 생명을 낳고 평화의 열매를 맺는다.

어느 날 통역을 하던 필자가 목사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시리아 난민부부가 더 이상 자녀들을 이 같은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문화에서 키울 수 없다며 개종을 원하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뿐이 아니다.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교회에 무슬림난민들이 증가하고 있다. 교회를 떠났던 가나안 독일 교인들도 난민들을 위한 자원봉사를 실천하다 교회의 환대에 감동해 교회로 돌아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신 목사님을 통해 들었다. 이 같은 난민들의 개종이야기는 영국에서도 들린다.



2000년 전 예수님의 몸짓은 혐오 가득한 당시대 종교인들의 인간관과 시선을 전복했고 그 시대가 감당할 수 없는 환대의 실천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혐오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주님, 저주받고 철저히 배제되었던 문둥병자와 장애인, 거라사 광인, 간음하다 잡힌 여인까지 품으셨던 주님의 환대는 이미 생명을 상실하고 혐오로 조각난 사회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교회의 시대를 열었고 이미 우리 시대의 교회의 담론조차도 초월해 있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환대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야 말로 피난처를 찾는 난민들에 대해 조건 없는 환대를 실천해야한다. 혐오와 불안과 종교정체성의 경쟁을 앞세우고 안전을 모색하다보면 진정한 난민성을 가진 무고한 이들에게 상처와 불안과 분노만 안길 따름이다. 종교간의 담은 높아지고 교회조차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평화는 취약해지고 시민사회의 사회통합은 요원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환대 가득한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일그러진 자화상안에 움츠러들고 갇히게 될 것이다. 예멘난민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 헤롯의 칼을 피해 황급히 먼 길 떠나온 마리아 품에 안긴 아기 예수의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퇴로를 차단당한 피난처를 찾는 이들에 대한 입장을 선명하게 할 때다.

최영일 목사 (김포이주민센터, 꿈푸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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