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발전? 오만버리고 자연과 공생

기술발전? 오만버리고 자연과 공생

[ 연중기획-인공지능시대를읽다 ] (11)포스트휴먼 시대의 참된 기독교적 영성

장윤재 교수
2018년 07월 20일(금) 12:03
포스트휴먼 시대의 참된 기독교적 영성



지금 휴머니즘(humanism)이 위기다. 인간을 다른 존재들과 범주적으로 구별하는 기독교적이고 칸트적인 버전의 휴머니즘이 문제다. 휴머니즘은 대체로 인간이 절대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는 믿음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포기하지 말아야 할 휴머니즘의 최고의 가치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이해가 우리 인간을 오만에 이르게 했다. 인간중심적이고 종(種)차별적인 휴머니즘을 낳았다.

생태여성주의에서 포스트휴머니즘에 이른 로지 브라이도티는 이러한 근대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현대의 과학적 진보와 지구적 경제 문제라는 이중의 압력으로 파열되고 있다고 진단하며, "모든 휴머니즘은 지금까지 제국주의적이었다"고 말한다. '인류'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은 범죄를 거의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필요성이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을 낳았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가 가진 오만과 초월적 범주인 '휴먼'이 주장하는 예외주의와 싸우는 이론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명백한 운명을 가진 자율적 주체라는 전망 속에서 결국 '인간신격화'를 낳은 휴머니즘의 과거를 극복하려는 이론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오늘날 현대 과학과 인문학이 활발하게 통섭하고 있는 담론의 장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의도는 무엇보다 '인간중심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휴먼 담론 안에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흐름도 있다. 기술결정론적 관점에서 인간이 새로운 종으로 변화 혹은 진화할 것이라 예언하면서 인간과 기계 및 인간과 정보의 융합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다. 기술에 우호적인 트랜스휴머니즘은 '허약한' 인간의 육체를 '더 나은' 기계로 대체하려 한다. 정신의 '탈(脫)육체화' 및 인간의 '사이보그화'를 꿈꾸며 새로운 종으로서의 '포스트휴먼'의 등장을 이야기한다.

이는 또 하나의 판타지다. 이러한 발상에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술적 매개를 통해 인간의 초월성을 다시 주장한다. 하지만 '정신 업로딩'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극단적인 탈체화는 오히려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며 이성적 정신을 절대시했던 과거 휴머니즘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이는 '근대적 주체'의 형성을 가능케 했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다를 바 없으며, 오히려 서구의 합리적 개인주의가 극단적인 모습으로 변형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도 문제다. 브라이도티는 선진 자본주의와 유전공학 기술은 왜곡된 포스트휴먼 형태의 트랜스휴머니즘을 낳는다고 비판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에 의한 '인간향상'을 적극 옹호하지만 정의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가장 적게 가진 사람들로부터 이미 너무 많이 가진 사람에게로 재원과 관심을 더욱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인간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동안,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기초적인 의료 서비스나 식량, 혹은 깨끗한 물이 없어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 도날 오마수나는 필요 이상 많이 가진 사람들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필요조차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존엄성을 향상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촉구한다.

진정한 포스트휴머니즘은 프로메테우스적인 정복의 충동을 다시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배우는 것이어야 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이 주창하는 것처럼 그동안 자연이 억겁에 걸쳐 진화시켜 놓은 것과 우리 종을 개선하려는 '신 놀음'이어서는 안 된다. 포스트휴먼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를 범주적으로 타자화해 온 근대 휴머니즘의 인간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를 버리고 땅과 동물과 식물과 지구와 자연이 함께 공생하는, 새로운 생태계 일원으로서의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연을 생명 없는 '기계적'인 것에서 살아있는 '유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사유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러한 전환을 '위대한 과업'이라 불렀다. 오늘의 지구 황폐화 시대로부터 인간과 지구가 상호 유익을 주고받았던 이전 시대로 가치 전환을 하는 것,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근대 산업문명을 자애로운 존재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위대한 과업이다. 베리 신부는 이러한 과업이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과제이며, 이를 위해 땅 생물 인간 등 지구의 구성원 전체가 하나의 '친밀한 지구 공동체'라는 비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근대 휴머니즘의 위기를 논하며 인간 존엄성에 대한 옹호가 결코 인간중심적이고 종차별적인 견해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존엄성이 인간을 오만의 자리에 이르게 하지 않도록 특권적인 지위를 없애야 한다. 폐쇄적인 자기동일성의 논리에 갇혀 있는 근대 인간중심적 휴머니즘을 넘어 우리는 비인간적인 것과의 배타적 구분을 지양하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늘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가 우리 호모사피엔스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늘 불만에 싸여 절제력과 통제력을 잃고 무조건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무책임한 신적 존재인 우리. 정말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이러한 휴먼에게 하나님이 물으신다.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인간을 향해 하나님이 최초로 던진 이 질문은 자신이 세계의 신이 된 줄로 착각하고 끝도 없이 오만해진 오늘 우리의 모든 휴먼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이 신학적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휴먼의 경계를 넘어 생명의 문제를 사유하고, 휴먼의 권리를 넘어 생명의 권리를 정의하며, 근대적 휴머니즘이 가진 인간중심주의의 오만함을 넘어 신과 인간과 그리고 자연의 관계에 대해 근원적으로 다시 성찰하도록 촉구한다.



장윤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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