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21일

7월 16~21일

[ 가정예배 ]

2018년 07월 16일(월) 18:22
월-1%의 논리
본문: 삿 7:1~9
찬송가: 357장

이번 러시아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다. 우리나라 태극전사들이 16강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세계최강 독일 팀을 시원하게 이김으로 자존심을 지켰다. 본래 독일과의 경기는 승률이 1%라 하여 이기기가 불가능함을 이야기 했는데 우리 팀이 승리함으로 1%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오늘의 시대는 모든 것을 물량의 크기로 따지는 것이 특징이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지, 평안한지, 진리 위에 서 있는지 보다 '몇 명이 모이느냐?'에 관심을 두고 질문을 한다. 또 모든 것을 확률로 이야기 한다. 타율, 합격률, 투표율, 지지율…. 모든 것을 확률을 따져보는 것은 바람직하다. 무턱대고 투자하여 큰 낭패를 당하기보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분석해 보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100% 의 확률이 있을 때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100퍼센트의 논리' 이것은 인간의 논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논리는 다른 것 같다. 본문은 기드온 300용사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해방 시켜 40년의 광야생활 끝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가나안 땅에는 본래부터 살고 있던 일곱 족속이 있었는데 가나안 정복 후 약 300년 동안이나 서로 쫓고 쫓기는 불안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지배를 받을 때의 일이다. 미디안은 7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이스라엘은 견디다 못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기드온을 지도자로 삼아 미디안을 몰아내게 하셨다. 기드온이 군인을 모집했는데 기껏 모인 수가 3만 2000명 이었다. 거기에 비해 미디안의 군대는 메뚜기 떼같이 많은데도 하나님은 "군대가 너무 많으니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겨우 300명뿐이었다. 겨우 1%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300명의 군사로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의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 이것이 1%의 논리다. 1%의 논리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큰일을 이루실 때마다 1%의 논리로 역사하셨다.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서야 이삭을 주셨다. 그들이 출산이 불가능할 때 이삭을 주셨다. 모세도 40대에 자기 백성을 구하려고 노력을 했으나 80세가 되어서야 그를 부르셔서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루게 하셨다. 출애굽의 역사는 하나님의 1%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그 1%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굳게 믿고 나아가야 하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인간의 논리를 내세우며 늘 교만에 빠지는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며 늘 겸손히 행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홍순안 목사/참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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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찬송합시다
본문: 고후 1:3~11
찬송가: 545장

창고가 필요한 이유는 지금 당장 사용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사용하게 될 물건들을 보관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창고에 있는 물건들이 필요와 목적에 따라 정리되어있지 않으면 정작 필요할 때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찬송할 이유를 알지 못하면 찬송은 그저 노래에 불과하다. 정작 찬송해야 할 순간에 절망하고 입술은 막혀버린다. 찬송할 이유를 정리해보자.
 
사도바울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 때문에 찬송하자고 한다. 주님의 뜻 안에서 고난 받는 것은 결코 공짜가 없다. 하나님은 그 환란을 반드시 위로하신다. 사람이 하는 위로는 말뿐인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보상이다. 그야말로 위로가 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눈물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했던 환란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나면, 모든 환란 당한 자들을 얼마든지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이 위로 역시 하나님의 보상하심에 기반한다. '주를 의지함이 곧 너희의 힘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바울은 함께 고난에 참여한 성도들에게 같은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을 것을 알기에 함께 찬송하자고 한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확신하면 환란 중에라도 견고한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할 정도의 극심한 환란도 여러차례 겪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 속에서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기대했다. 고난은 자기 스스로를 의지하지 말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고 고백한다. 환란의 목적을 알면 지하감옥에서도 찬송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다. 소망은 미리 앞당겨 품는 것이고, 찬송은 선물을 받아들기 전에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소망의 견고함 때문이다.
 
바울은 함께 고난에 참여하며,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소망하고, 함께 찬송할 동역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한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고, 고린도교회는 미숙함과 많은 문제들이 있는 교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의 기도 동역을 요청한다. 바울의 위대한 사역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의 힘이었다. 그 은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할 것이다. 찬송하자. 찬송케 하자.
 
오늘의 기도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현재의 내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대하며 찬송하게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경수 목사/온양농아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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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욥의 세 가지 감사
본문: 욥 10:12
찬송가: 435장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범죄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원인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사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잠시나마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세어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감사의 신앙을 회복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동방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불리던 욥에게는 눈앞의 태양도 달도 밤하늘의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 암담한 절망뿐이었다. 설상가상 온 몸에 종기가 나서 피고름이 흐르고 구더기가 득실거리게 되었고 마지막 위로를 기대하던 아내마저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욥에게 말하고 떠나버렸다. 비참한 때에 그는 하나님과 겸손하게 변론을 한다. 그리고 마음 깊은 데에서부터 감사가 우러나와 이렇게 고백한다.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므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이 말씀 속에서 욥의 세 가지 감사 고백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셨다. 내게 생명을 주셔서 내가 아직 살아서 호흡하며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오늘 죽는다 해도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아름다운 신앙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도 주셨다. 말씀대로 영원히 죽지 않는 이 생명의 신비!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셨다. 욥은 처참하고 암담한 순간에도 하나님이 전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는 말로다 표현할 수가 없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정신이 불안정하고 이성을 잃어버린 폐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일할 수 있고, 가족과 함께 먹고 입고 살아가는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더욱 더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내 영을 지키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없이 방문하셨다.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찾아오신 것이다. 예배시간에 설교를 듣는 순간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뜨거운 감동을 주시기도 하고, 기쁨을 주시기도 하고, 죄책감이나 애통함으로 회개하게도 하신다. 낭패와 실망을 당한 심령을 위로하시며, 격려하시기도 하신다.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영혼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구원하심을 잊지 않고 믿음과 감사로 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완철 목사/성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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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감사하며 사는 가정
본문: 살후 1:3~5
찬송가: 589장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고,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억하면 어떤 환경에도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는 가정이 될 수밖에 없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 때문에 항상 감사했다. 견디고 있는 박해와 환란 중에도 감사했다. 인내와 믿음으로 감사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기에 감사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이기에 감사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박해와 환란을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내는 과정에서 믿음이 더욱 자라나고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해졌기에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박해와 환란 중에도 항상 감사하면 인내와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 감사하면 믿음이 자라나고 사랑이 풍성해진다. 감사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순간 우리 속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시편 100편을 보면 하나님 앞으로 나갈 때도 감사함으로 나가서도 감사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소유로 백성으로 기르시는 양으로 삼아주신 분이시며 우리를 향해선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심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사하는 순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위해 어떻게 행동하시는 분이신지 생각나기 때문,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 믿음으로 살아가게 한다.
 
두 번째로 감사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현실이 될 줄 확신하게 한다. 예수님께선 광야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먹을 것이라고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지만 남자만 5000명을 먹이고도 남을 줄 믿고 감사기도 하신 후 떼어 나눠주셨다. 그랬더니 소망하신 대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고도 부스러기만 12광주리나 거두었다.
 
세 번째로 감사는 현실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한 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메섹에서부터 로마 감옥에 이르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지만 단 순간도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했다. 능동적이고 힘 있게 믿음생활을 했다. 한 곳이라도 더 복음 전하고,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고, 한 교회라도 더 세우고 싶어서 항상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기에 감사는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능동적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며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을 키우고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을 풍성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재곤 목사/포항수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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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국을 소망하는 삶
본문: 계 21:1~5
찬송가: 235장

사람은 위를 보고 사는 존재이다. 예일대학교의 자로슬라브 펠리칸 박사는 "땅을 바라보면 비판주의자가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땅을 바라보면 우울한 사람이 되고,하늘을 바라보면 밝고 즐거운 사람이 된다"고 말했다. 왜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교회 역사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소망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완성자 어거스틴도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는 '신의 도성'이란 책을 쓰면서 로마도성이 망한다고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이 무너지는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했다. 또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성화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거기서 우리는 쉬고, 보며, 사랑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삶도 종말과 천국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다. 그는 옥중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다. 천국이 어떤 곳이길래 이토록 사모해야 하는 것일까? 이 세상은 수고와 슬픔뿐이지만 천국은 다시는 저주가 없는 곳이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아픈 것이나,곡하는 것이나, 고통하는 것이 없고, 이 땅에서의 흘린 모든 눈물을 주님이 친히 닦아주시는 곳이다. 다시는 해함도 상함도 없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을 가득 덮는 곳이다. 우리의 모든 불만족이 충족되는 곳이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하며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게되고 즐거이 찬양하는곳이다. 이처럼 우리도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일시적인 세상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세상의 부귀영화는 아침이슬과 같고 안개와도 같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자는 잠시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마음과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다. 또한 선한 일에 헌신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의 놀라운 상급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C.S 루이스는 역사를 더듬어 볼때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사람은 천국을 가장 많이 사모했던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어두운 중세기를 진리로 환하게 비춘 것은 다름 아닌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사도들, 종교개혁자들,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이었다. 이땅의 우상숭배를 배척하고,예수천당을 외쳤던 자들 역시 천국을 소망하며 고대하던자들이었다. 교회가 타락하고 천국소망이 멀어질 때는 기독교가 힘을 잃었고, 교회가 천국을 소망하게 될 때 비로소 세상을 밝게 비추는 등대가 될 수 있다. 땅에 살지만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며 힘차게 달려가야겠다.
 
오늘의 기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미자 목사/주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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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귀히 쓰임 받는 그릇
본문: 롬 9:19~24
찬송가: 425장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교인들과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말씀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각자 맡은 직분이 있다는 것을 그릇의 비유를 통하여 알려 주셨다. 여기서 귀한 그릇이란 자기의 일에 충실하는 꼭 쓸모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한 그릇이란 자기의 임무를 망각하고 소홀히 여겨서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깨끗한 그릇이 돼야 한다. 그릇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없다. 더러운 오물이 잔뜩 묻어 있으면 그 그릇은 귀하게 쓰임 받지 못한다. 우리들의 심령이 세상의 더러운 죄악으로 더럽혀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여도 쓰실 수가 없다. 회개하여 예수님의 보혈로서 깨끗하게 죄를 사함 받고 깨끗한 그릇이 돼야 한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안과 밖이 모두 깨끗해야 한다. 그래야만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깨끗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청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견고하여 깨지지 않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값비싼 그릇이라도 깨지면 소용이 없다. 고려시대에 만든 청자, 이조 백자 같은 도자기는 값이 많이 나간다. 그런데 그 비싼 도자기도 깨지면 값이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깨지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육체가 병들면 아무리 충성심이 강하다고 해도 충성을 할 수가 없다. 인격적으로 깨지지 말아야 한다. 인격적으로 깨진다는 것은 큰 범죄를 하거나 실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감이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셋째, 신앙과 믿음이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씩 믿음이 깨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 깨어진 그릇은 어떤 사람일까? 낙심한 자들이다. 그리고 불평과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다. 봉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육체적으로 건강해야 하고, 인격적으로 남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신앙적으로 견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설 수 있는 성도가 되어서 깨지지 않는 그릇이 되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깨끗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충만함으로 깨지지 않고 잘 준비된 그릇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귀한 일에 쓰임받는 그릇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정식 목사/봉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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