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역경을 소망으로' 정복수 장로

'고난과 역경을 소망으로' 정복수 장로

[ 기획 ] 도원교회 시무장로, 전 경안노회장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20년 08월 17일(월) 09:52
정복수 장로 가족사진. 정 장로는 믿음과 순종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귀하게 쓰임받았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은 정복수 장로(경안노회 도원교회)의 삶을 관통하는 성경구절이다. 시골 가난한 가정에서, 소위 '흙수저'로 태어나 환경을 탓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했다.

척박한 여건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아들인 그다. 그러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었다. 정 장로는 경안노회 노회장을 역임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여러 부서에서 두루 쓰임받았다.

정복수 장로는 경북 예천군 풍양면 흥천리가 고향이다. 소작농 가정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가난한 환경에서 부모의 영향으로 인내와 불굴의 개척정신을 체득했다.

아버지는 전통가락을 잘 풀어내 명창으로 불렸다. 엄하지만 사랑이 많았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내색 없이 묵묵히 감내하는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집안과 마을의 경조사에 대모 역할을 하던 여장부였다. 자녀에게 항상 용기를 북돋우며 자존감을 세워주었다.

정복수 장로는 집안의 끼니 걱정 덜겠다고 군에 입대한 후 베트남전쟁 파병을 자원했다.
정 장로의 어린 시절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꼴을 베어 소를 먹이는게 일상이었다. 추수 때면 벼와 보리를 지개로 옮겨 마당에서 타작을 했다.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시절, 쌀밥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초봄이면 양식이 바닥나 동네 부잣집에서 쌀을 빌려 먹고, 가을에 이자와 함께 갚는 것이 매년 반복됐습니다."

누나들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정 장로는 누나들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정 장로는 "부모님은 유교적 가풍의 영향으로 교회는 '상것'이나 가는 곳이라고 반기지 않으셨다"며 "그래서 교회를 정기적으로 가지는 못했지만 절기 행사는 빠지지 않았다. 성경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그냥 재밌었다"고 회고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입 하나 덜겠다고 군에 빨리 입대한 후 베트남전쟁 파병을 자원했다. 훈련 과정에서 베트남어를 배우고 민사심리전 요원인 통역병으로 비둘기부대에 배속됐다.

복무 중 성실함으로 1계급 특진을 하는 와중에 폐결핵 진단을 받으며 18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치료를 받으며 교회를 다시 다니게 되면서 사그라진 복음의 불씨가 살아났다. 교회는 그에게 위로처였다.

정복수 장로는 경안노회 노회장을 지내며, 노회의 여러 크고작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제대 후 1973년 예천군 풍양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 이 무렵 부인 한춘희 권사를 만나 결혼하고 전도를 해 신앙의 동반자가 됐다.

4년 후 예천군청으로 발령이 나며 가족과 따로 떨어진 생활을 했다. 정 장로는 읍내에 방 한칸 사글세로 얻어 살고, 부인 한 권사는 홀로 농사일은 물론 소와 염소를 키우며 전기도 없는 깡촌에서 두 아들을 키웠다.

이 무렵 정 장로의 신앙은 이전보다 두터워졌다. 일과가 끝나면 혼자 사는 방에서 성경 묵상과 기도로 외로움을 달랬다.

"근무지의 타지역 발령으로 이불보따리 하나 자전거에 싣고 집을 떠날 때 아내와 생이별처럼 서럽게 울던 생각이 나네요. 예천까지 비포장도로 30km를 자전거로 달리며 흙먼지 섞인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 됐지요."

1981년 다시 의성군청으로, 그리고 1년 뒤 안동시청으로 발령받으며 현재 시무장로로 있는 도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북한선교를 오랜 기간 해온 정복수 장로는 탈북민을 통한 선교론에 관심을 갖고 있다. 사진은 총회 남북한선교통일위원장으로 북한에 콩기름을 보낼 당시의 정복수 장로(왼쪽에서 다섯번째).
그는 공무원으로 35년 근무하고 퇴직했다. 공무를 집행하다 보면 물질로 유혹받는 순간이 더러 찾아오지만 신앙으로 이겨내고 하나님 앞에 한점 부끄러움 없이 명예롭게 퇴직한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직장에 다니면서 자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 주경야독으로 대학교와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며 집념과 뚝심을 보이기도 했다.

안동시청에서 근무할 때는 신우회를 조직하고, 공무원으로서 사회와 사람을 섬긴다는 신조로 전도에 열을 올렸다. 신우회 회원들과 관내 독거노인과 복지시설을 정기적으로 찾아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교회의 상위기관인 노회와 총회에서 두루 쓰임을 받았다. 경안노회 노회장을 역임하고, 총회에서는 남북한선교통일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북한선교에 공헌했다. 현재 총회 통일선교대학원 학장인 그는 북한선교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정 장로는 "북한에 콩기름과 밀가루 등을 지원하는 사역을 오래 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선교통일론을 고민하게 됐다"며 "북한동포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정치적 이념을 떠나 인도주의적 지원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탈북민을 활용한 복음통일선교에 관심을 두고 관련 사역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노회장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노회에 여러 변화들을 이끌었다. 우선 경선을 통해 노회장으로 선출되어 장로노회장이 정례적으로 세워지도록 기틀을 마련한 것은 물론 노회장을 지내면서는 신속한 선거관리를 위한 개표기 설치, 2명의 장로 총회 순교자 추대, 여성위원회 조직, 노회 최초 여성총대 3명 선출, 차기 노회장으로 여성목사 배출 등의 변혁이 일어났다.

도원교회 당회원들과. 올해 말 시무장로 은퇴를 앞둔 정복수 장로는 '단소승자(端笑勝者)'의 꿈을 안고 복음의 사명자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평신도 연합활동으로 남선교회전국연합회와 전국장로회연합회에서 부회장을 지냈으며, 특히 남선교회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기며 모범회원상과 공로대상을 수상했다.

정 장로는 교회에서와 사회에서의 행동이 일치하는 신앙인이기도 하다. 소명을 받은 사명자로서 사회를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으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사회공헌 활동에 열심을 보였다.

그래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법무부 법사랑위원, 기드온을 통한 성경보급 운동,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안동요양원 운영위원장 등으로 헌신해왔다.

이러한 활동이 대외적으로 인정받아 지난 6월 보훈대상자 복지증진을 통해 국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무총리표창을 수상했다.

올해 말 시무장로 은퇴를 앞둔 정복수 장로는 "인생 후반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전반전 못지않은 열심을 통해 충성된 종으로서 살아가고 싶다"며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이긴 사람이라는 뜻의 '단소승자(端笑勝者)'의 꿈을 안고 끝까지 복음의 사명자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신동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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