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이웃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14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

류호성 교수
2020년 10월 23일(금) 09:15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친 비유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비유의 제목처럼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 2008년도에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곧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로,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를 돌보다가 발생하는 재산상의 손해와 사상(死傷)에 대해서 고의나 중대 과실이 없을 경우에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받지 않는다.

이 비유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첫째는, 자료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네 가지 견해가 있다. ① '가장 큰 계명'에 관한 평행본문 마가복음 12:28~31 그리고 마태복음 22:34~40과 비교해 보면, 누가복음 10:25~29은 '영생'의 문제로 변화되었는데, 이것은 누가가 마가와 마태의 자료를 갖고 각색했다는 것이다. ② 앞부분과 같은 방법으로 평행본문을 비교해서, 누가복음 10:30~37의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내용이 마가와 마태에 없기 때문에, 이것을 누가가 창작했다는 것이다. ③ 누가복음 10:25~29과 30~37절은 각각 예수님의 전승인데, 이것을 누가가 편집해서 하나로 합쳤다는 것이다. 위의 세 견해가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논리는 '이웃'(플레시온)에 대한 개념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10:25~29에서는 이웃은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는데, 10:30~37에서는 사랑의 '주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④ 누가복음 10:25~37 전체가 본래 예수님의 전승이라는 것이다. ④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25~37절이 '율법의 계명, 이웃 및 이웃에 대한 비유'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는데, 이러한 점은 예수님의 다른 전승과 동일하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1:3)라고 보도하는데, 이것은 그가 예수님에 관한 전승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누가는 위대한 신학자이지만, 예수님의 전승을 훼손하거나 또는 창작해서 무리하게 누가복음을 기록하지 않았다.

둘째는 장르에 관한 것이다. 아돌프 율리허의 견해에 따라 비유라는 큰 틀 아래에는, 세 부류의 하위 장르가 있다. ① 자연의 진행 과정이나 일상의 경험이나 소재를 언급한 '확대 직유'(Gleichnis(독), similitude(영))이다. 겨자씨의 비유(막 4:30~32)나 누룩의 비유(눅 13:18~21)가 여기에 속한다. ② 아주 개별적이고 또는 비정상적인 사건이나 사례를 소재로 하는 '파라벨'(Parabel(독), parable(영)) 이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 20:1~16)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③ 구체적인 모범을 제시하는 '모범 이야기'(Beispielerzalung(독), examplary story(영))이다. 이러한 분류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결론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라는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에, '모범 이야기'로 분류한다. 그러나 혹자는 이 비유를 사마리아인의 관점이 아니라 강도 만난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그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관한 것이기에 오히려 '파라벨'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 비유를 '예화'로 분류한다. 그런데 '예화'와 '모범 이야기'는 서로 다른 문학 유형이다. '예화'는 어떤 사상이나 의도를 선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도입하는 실례이지만, '모범 이야기'는 바른 행동이나 처신을 보여 주는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이다.

셋째는 문맥에 따른 이해이다. 두 가지 시각이 있는데, 하나는 이 비유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긴 여정(9:51~19:27)의 넓은 문맥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비유가 18:18~30과 대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주제가 동일하게 '영생'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10:25~42를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율법의 주제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에, 30~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 사랑을 말하며, 38~42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넷째는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이다. 일반적으로 두 인물에 초점을 둔다. ①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그들은 강도 만나서 거의 죽게 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31~32절). 그들은 시체를 만져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는 레위기의 계명(21:1)을 따라 행동했지만, 그러나 미쉬나(Nazr, 7.1)와 탈무드에 따르면 죽어가는 자를 돌보는 것은 제사장의 의무이다. ②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사마리아인이다. 그는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자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숙박과 치료 비용으로 10일 이상의 비용인 2데나리온을 지불한다. 그런데 여기서 해석자들이 간과하는 사실은 이 사마리아인도 자신들의 경전인 모세 5경을 토대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사마리아인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토라의 핵심을 해석에만 그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율법사의 종교적 행위까지도 비판하는 셈이다.

다섯째는 이 비유의 주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사회적, 인종적 편견과 갈등을 넘어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면서까지도 소외당하거나 고통받는 사람을(- 바로 이들이 이웃) 사랑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 비유가 '천국의 제자직'이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끝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신앙생활은 율법사,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처럼 사랑의 관념이나 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처럼 헌신적인 사랑의 실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은 유대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이기에,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는 것이다(눅 6:35).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행위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류호성 교수/서울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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