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는가?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는가?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23>자연신학 논쟁

박경수 교수
2021년 02월 23일(화) 08:32
에밀 브루너(좌)와 칼 바르트(우).
1934년 '신(新)정통주의'라 불리는 신학 학파 동료인 에밀 브루너(1889~1966)와 칼 바르트(1886~1968) 사이에 물러설 수 없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흔히 자연신학 논쟁이라 불리는 이 격돌의 초점은 인간이 자연, 경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신정통주의는 18~19세기 유럽을 풍미한 자유주의 신학과 20세기 초반의 근본주의 신학을 모두 비판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신학 사조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되 성경문자주의를 넘어서려는 변증법적 태도를 유지했다.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신학의 출발점과 근거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폭로하고, 동시에 성경을 '종이 교황'이나 부적처럼 우상화한 근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신정통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의 출발점이고, 내용이며, 종착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신정통주의를 '하나님 말씀의 신학' 혹은 '변증법적 신학'이라 부른다.

신정통주의 신학의 쌍두마차와 같은 역할을 했던 바르트와 브루너에게서 각기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1920년 후반부터였다. 급기야 브루너는 1934년 '자연과 은혜'라는 책을 통해 자신과 바르트의 차이점을 밝히고 바르트의 관점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바르트가 '아니요!'라는 책을 출판해 브루너의 주장과 그 근거들을 비판했다. 두 사람의 논쟁점은 타락한 인간에게 자연이나 역사와 같은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브루너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바르트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브루너의 '자연과 은혜'

브루너는 먼저 자유주의 신학의 일탈을 바로잡고 그리스도교 신학이 다루어야 할 정당한 주제를 회복시킨 일등공신이 바르트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감사를 표한다. 바르트야말로 신학이 '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있는 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계몽주의 주제가 아닌 성경의 주제를 다루어야 함'을 확신시켰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너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처럼 바르트의 지나침이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고 있다고 보았다.

브루너는 묻는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는가? 일반계시는 철저히 배척돼야 하는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접촉점은 전혀 없는가? '은총은 자연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는 말은 틀린 것이며 이교적인가?" 브루너는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실질적(material)인 하나님의 형상은 소멸되었지만, 형식적(formal)인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한다. 브루너에게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이란 양심이나 이성과 같은 인격성이며, 이것이 인간을 책임적 존재로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접촉점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과 역사와 경험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발견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물론 성경이라는 특별계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알게 되지만, 자연이라는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희미하게나마 발견하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루너는 성경의 여러 구절과 칼뱅의 '기독교강요'에서 그 근거를 찾아 제시하면서, 자연신학은 신학과 교회와 선교를 위해서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의 '아니요!'

바르트는 '브루너가 자연신학이라는 악마를 불러들인 것은 자유주의의 망령을 소환한 것'이라 지적한다. 이를 그대로 용인한다면 미래의 신학이 타협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 자명해서 자신이 긴급하게 브루너의 책에 대해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나치즘을 수긍하고 받아들인 독일 교회의 불행이 바로 이 타협적인 신학에서 비롯되었다며, 브루너를 위시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의 변절에 분노했다.

바르트는 타락으로 인해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완전히 사라졌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실질적 형상과 형식적 형상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혹평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관련하여 인간에게는 어떠한 접촉점도 없으며, "일반계시를 주장하는 모든 시도는 배척돼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그 지식은 사실상 인간이 만들어 낸 초월적 환상일 뿐이고, 자연신학의 계시와 성경의 계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바르트는 브루너가 성경과 칼뱅의 관점을 잘못 해석하고서 그것을 자기주장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한다. 결국 바르트는 '복음적 교회와 복음적 신학은 자연신학 때문에 병들고 죽게 될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동지인가 적인가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명제처럼,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전적 타자'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계시될 때에만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 계시를 담고 있는 책이 성경이며, 특별히 성경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결코 다른 곳에는 없다'는 '교회교의학'의 공리가 바르트 주장의 핵심이다.

브루너는 바르트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책임성에 대해 고민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할 능력이 전혀 없다면, 계시는 계시가 될 수 없지 않는가? 적어도 인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또한 하나님의 계시인 창조세계를 통해 전하실 때 하나님의 뜻을 수동적으로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접촉점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일반계시의 가능성을 일축한 바르트가 13권의 방대한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려고 한 것은 모순이 아닌가? 브루너는 여전히 바르트를 '친구'요 '동지'라 부르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사실상 근본적인 견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작은 틈이 큰 댐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자연신학이라는 작은 틈이 결국 복음과 신학과 교회를 와해시킬 것이라고 염려했다. 자연과 역사를 통해 인간이 계시를 수용할 능력이 있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20세기 바르트와 브루너의 자연신학 논쟁은 교회사에 등장했던 중요 논쟁들, 즉 테르툴리아누스와 유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루터와 에라스무스, 호마루스와 아르미니우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들과도 어느 정도 연관성을 지닌다.

박경수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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