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이 본 1959년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원인 (상)

선교사들이 본 1959년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원인 (상)

[ 아카이브 ] 한국기독공보 아카이브를 통해 본 현장

정병준 교수
2021년 04월 07일(수) 13:19
한국전쟁 이후, 장로교 선교부는 김재준의 조선신학교, 한상동의 고려신학교, 박형룡의 장로회신학교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최종적으로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명분으로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세워 신학교육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남장로회 선교부는 가장 적극적으로 박형룡 박사를 지지했고, 북장로회 선교부는 그의 행정 능력을 의심했으나 그의 신학은 지지했다. 한경직 목사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합동안을 제시했다가 박형룡 박사 지지자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1952년 4월 대구 총회에서 박형룡 박사의 측근들은(총회장 김재석, 서기 김상권) 월남한 목사들의 큰 지지를 받으면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942년 제31회 총회의 이북 노회의 총대 수를 그대로 받기로 결정했다. 한순간에 10개의 이북 노회 79명의 총대가 확보되었다. 그 힘으로 조선신학교와 김재준 교수를 정죄했다. 1953년 박형룡 박사는 총회신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장로교 선교사들의 일방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총회신학교의 교장이 된 박형룡 박사는 불과 4년 만에 선교사들의 모든 신뢰를 상실했다. 1959년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에 대한 주요 원인에 대해 혹자는 에큐메니칼 신학을 이유로 들고 있으나 1950년대 후반 선교사들의 문서와 편지 그리고 <기독공보>에 보도된 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살펴보면, 선교사들이 박형룡 박사와 그의 주변의 NAE (한국 복음주의협회) 인사들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그들의 비윤리적 행동과 거짓말 때문이었다.

1. 박형룡 박사의 해외여행과 모금 2만불의 행방에 대한 의혹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는 박형룡 교장이 세계로 안목을 넓히고 장로회신학교를 위한 모금을 할 수 있도록 3000불의 여비를 마련해서 세계 여행을 하도록 지원했다. 그는 1954년 10월 12일에서 1955년 4월 16일까지 6개월 동안 미국, 스코틀랜드와 런던, 스웨덴 스톡홀름, 네덜란드 암스텔담,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스위스 제네바, 로마, 아테네, 레바논, 예루살렘, 파키스탄 파라치, 인도 카타, 태국 방콕, 홍콩, 마닐라, 동경을 여행했다. 이 당시 미국북장로교회는 12만불을 모금해서 10만불은 서울로 직접 송금했고 2만불은 박 교장에게 직접 수표로 주었다. 반하우스는 『한국에서의 스캔들』(Scandal in Korea, 1960)에서 1957년 3천만환 사건을 조사할 때 미국에서 받은 2만불의 행방에 대해서 감사가 있었으나 그 돈이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1955년 4월 박형룡 교장이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독공보 기자는 박교장에게 WCC에 대해 질문했다. "[문] WCC 본부를 방문하였습니까? 용공단체라는 데 대하여 어떻게 관찰하였습니까 [답] WCC 제네바 본부에 들렀었다. WCC는 공산국에 있는 교회와도 연락을 짓는다. 그들이 국제회의에 공산국가의 교회 대표로 참석하나 사업적 연락을 짓는 단체뿐이요 그것을 용공 단체라고는 할 수 없다. (<기독공보> 1955.4.25.) 그러나 2년 후 정치적 어려움을 당하자 박형룡 박사와 측근들은 WCC를 용공, 신신학, 단일교회를 추구하는 단체로 공격했다.

2. 태국 선교에 대한 공격과 선교비 증발 사건

1955년 예장 총회는 해방 후 첫 해외선교사 파송을 결정했다. 그때 한경직 목사가 총회장이었고 영락교회가 태국선교비를 후원했다. 최찬영 선교사는 태국 선교사로 사역했고 훗날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아시아 태평양 지역 성서공회 총무로 사역했다.

1956년 장로교 NAE 세력은 태국교회가 에큐메니칼 교회고, 장로교회가 아닌 '잡종' '혼혈아'교회를 낳는다고 트집을 잡아 공격했다. (<기독공보> 1956.10.8.) 사실 그것은 한경직 목사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었다. 1956년 총회 교권을 장악한 NAE 세력은 총회 총무제도를 신설하고 김상권 목사를 서기 겸 총무로 임명했다. 그는 해외선교사에게 선교비를 보내는 책임도 담당했다. 당시 선교비는 한국 북장로회 선교부 사무실을 통해 태국의 북장로회 선교부 계좌로 송금 되었다. 그러나 태국의 선교부 회계는 한국선교사가 선교활동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선교사들에게 보고했다. 1959년 최찬영 선교사가 태국교회 총회장을 데리고 입국했을 때, 그는 친구 목사가 보낸 상당한 금액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이 사건이 1959년 대전 총회에서 다루어질 사안이었고 그 책임은 김상권 목사였다고 말한다. ('1959년 한국장로교회 대전 총회의 배경' 미국연합장로교회로 보내는 출판용 보고서)

3. 신학교 3천 만환 부정 지출 사건이 지닌 윤리적 의미

박형룡 교장은 정부 소유의 남산장로회 신학교 부지소유권을 매입할 목적으로 자기의 측근 NAE 인사들을 중심으로 부지위원회를 임명했다. 그리고 총무과장 박내승과 회계 김창준과 더불어 이사회 허락 없이 신학교 자금 3천 만환을 로비스트 박호근에게 지출했다가 사기를 당했다. 이 사실은 1957년 11월 신학교 실행이사회에서 공론화되었다. 그 땅은 이미 국가에서 국회의사당을 설립하기로 계획된 땅이었다. 박형룡 교장이 잃어버린 공금 30,162,172환 중 큰 내역은 다음과 같다.

채용금지불이자 2,673,300, 지목변경측량비 475,450, 접대비 115,570, 잡비 126,800, 박호근에게 준 돈 22,534,192, 박내승에게 불법으로 지출한 돈 4,186,700 (<기독공보> 1960.6.6.)

간단히 말하면 선교부와 해외에서 보낸 소중한 헌금과 가난한 신학생들의 등록금을 가지고 함부로 접대하고 엄청난 거금을 사기당한 것이다. 당시 3천 만환은 현재의 물가지수로 50배의 가치가 있고 약 15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박호근에게 주었다고 주장하는 2200만환은 박형룡 교장의 서명으로 30회 이상의 수표로 발행되었다. 그러나 단 1건의 영수증도 없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를 주었은지 증명할 길이 없다. 사전에 부정행위를 저지를 목적이 아니라면 이사회 허락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없는 것이다. 박형룡 교장은 자기는 아는바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고, 총무과장과 일개 직원이 이 사건의 주모자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결국 선교사들은 신학교 부지지원회 위원들(대구 NAE 김삼대, 서울 NAE 김윤찬 등)에게 혐의가 있다고 보았다. 이 3천만환 사건은 평신도위원회가 조사했고, 역시 1959 총회에서 보고되어야 할 내용이었다. 따라서 총회 NAE 세력은 막강한 정치 세력인 경북 NAE와 야합해서 교권을 대구 쪽으로 넘겨주고 대신 자신들의 문제를 덮고 박형룡 박사를 복귀시키는 방안을 구상하게 된다. 3천만환 사건을 숨기지 말고 형사사건으로 넘겼더라면 오히려 교단 분열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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