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릴 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릴 때

[ 땅끝편지 ] 러시아 최영모 선교사6

최영모 선교사
2021년 05월 05일(수) 11:02
6년 전 촬영한 최영모 선교사의 가족사진. 뒷열 왼쪽은 큰 아들 부부이며, 오른쪽은 작은 아들 부부다. 앞열은 필자 부부와 늦둥이 딸이다. 지금은 두명의 손주가 더 있다.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이었다. 슈퍼마켓에서 한국산 '초코파이'를 보았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한국 물건을 보면 반가운데, 그때가 1995년이었으니…. 하지만 한국과 비교해 너무 비싼 것 같아 그대로 돌아오니, 가족들의 성화가 대단하다. "아무리 비싸도 한국 것인데" 하면서 아이들은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다. 할 수 없이 저녁 식사 후에 등떠밀려 다시 가게에 갔다. 하지만 초코파이는 그사이에 다 팔리고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의 실망과 함께 아쉬움, 후회가 한꺼번에 뒤엉킨다. 그리고 3년 만에 첫 휴가로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동네 슈퍼마켓에서 초코파이를 보자 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말한다. "아빠, 여기 있는 초코파이를 다 사요. 언제 없어질지 모르잖아요."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몇몇 분들이 한동안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초코파이를 잔뜩 갖고 왔고, 덕분에 러시아 교인들과 즐겁게 나눌 수 있었다.

오늘은 잠시 가족 얘기를 나누고 싶다. 필자가 선교훈련을 받을 때, 어느 교수는 선교편지에 가족 얘기 쓰는 것을 비난하며, "가족은 기도 제목에도 올리지 말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가족 또한 선교사이며, 사역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내나 자녀가 선교지에 적응하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철수하는 선교사도 여럿 보았다.

필자의 집 거실에는 렘브란트가 그린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의 그림이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천사가 세차게 아브라함의 손을 밀쳐 칼을 놓쳐버리는 내용이다. 왼손으로 이삭의 얼굴을 덮고 있는 아브라함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다. 아마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는 아버지의 심정에서일 게다.

그 그림에 유독 애착이 가는 이유가 있다. 선교지로 떠나기 전,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야 사명감으로 간다지만 두 아이는 어떻게 교육해야 하지?" 그러자 아내는 성경 이야기를 꺼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미리 다 준비해두셨어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다 준비해놓으실 거예요."(이럴 때는 누가 목사인지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필자 부부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거실에 걸었고, 그 그림을 보면서 선교사 초기의 각오와 결단을 상기하곤 했다.

그러나 아내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치기만만했던가를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만 생각했지, 아들 이삭의 심정까지는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결박된 채로 거친 장작더미 위에 누워, 아버지의 손에 죽어야만 하는 아들의 소리 없는 비명을 아내는 선교지에 살면서 느낀 것이다. 낯선 땅에서 받아야 했던 아이들의 많은 상처는 부모에게도 지워지지 않은 아픔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장성한 두 아들은 결혼해 부모의 품을 떠났지만, 부모에게 남아있는 아픈 기억들은 아직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는 그 그림을 눈에서나 마음에서나 내려놓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림은 아직도 여전히 그 자리에 걸려 있다. 필자의 나이 쉰에 얻은, 가슴으로 낳은 늦둥이 딸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들 둘을 키워보았으니 딸 하나쯤이야'라던 자신만만했던 생각은 점차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로 변해갔지만 말이다.

'엄마 찬스'라는 표현이 유행하던 무렵, "너희는 '엄마와 아빠의 찬스'를 누리지 못하지만, 대신 '하나님 찬스'만이라도 누리기 바란다"는 문자를 아이들에게 보냈다. 그때 큰아들에게서 온 문자는 지금도 여전히 모리아 산에 있는 필자 부부에게 큰 행복과 감사로 다가온다.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삶의 귀한 방향을 잘 잡아주는 부모가 더 귀중한 찬스고, 그걸 누리면서 자랄 수 있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선교사 부모를 따라나선 모든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고 세상을 덜 닮기를 바랄 뿐이다.

최영모 목사 /총회 파송 러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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