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Sign)'의 회복

'사인(Sign)'의 회복

[ 논설위원칼럼 ]

장승권 목사
2022년 12월 19일(월) 08:29
어렸을 때 시내에 나가면 듣는 캐럴송은 마음을 설레게 하였고, 예배당마다 설치된 성탄트리는 마음을 환하게 하였다. 캐럴송과 트리는 성탄의 상징(Sign)이었다. 그러나 요즘 캐럴송은 듣기 어렵고, 트리도 보기 힘들다. 캐럴과 트리가 MZ세대에게는 옛날 이야기일뿐이다. 성탄트리마저도 시청이나 도청 광장에 설치된 것으로 합의(?)하고 예배당에서 찾아 보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의 사인(Sign of God)이 사라졌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랑과 구원의 사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드러내는 방법은 '사인(Sign)'이었다. 하나님은 동방박사와 목자들에게 각자 메시야 탄생을 알 수 있는 사인을 주셨다. 지식을 추구하는 박사들에게는 하늘의 별(Star)로, 경험으로 사는 목자들에게는 천사들의 방문을 통하여 알려 주셨다. 예수님이 나신(오신) 베들레헴은 히브리어로는 '빵의 집', 아랍어로는 '고기집'이란 뜻이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 '빵'과 '양'을 납품하는 마을이었다. 그 빵의 집에 진짜 '생명의 빵'(요6:51)이, 하나님께 드릴 제물(양)을 기르는 곳에 영원한 제물이신 어린 양(요1:36) 예수님이 오셨다. 천사들은 성전에 바칠 어린 양을 기르는 성전(레위) 목자들에게 '강보'로 감싸고 구유에 누인 아이가 메시야라는 표적(Sign)임을 가르쳐 주었다.(눅2:12) 강보는 희생제물로 사용될 양이 태어 났을 때, 여행시 사고를 당하면 상처나 시신을 감싸는 천을 말한다. 구유는 양의 새끼를 누임으로 온전하게 보호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목자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는 순간 그 아기가 '메시야'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빵', '어린 양', '강보', '구유'는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베들레헴은 상징의 마을, 복음의 마을이다. 그래서 참 생명과 진리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는 교회는 상징을 깨닫고, 가르쳐 주고, 전해야 한다. 상징이 사라져 가는 것은 곧 복음이 약화되어 가는 것이다.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망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고 잊거나 잃어서도 안된다.

2019년 시작된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정지시켰다.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뉴노멀(New Nomal)' 시대를 열었고 사람들의 이동과 교제는 금지되거나 제한되었으며 교회의 예배마저도 강제로 드리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전 국민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코로나 블루(Corona Blue)'를 겪고 있으며 아직도 코로나19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수 많은 생명을 잃었다. 그 슬픔과 상처가 과연 치유될 수 있을까? 현실 앞에 탄식이 절로 나온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유족들에게 더 나아가 국민들에게 어떤 위로를 보낼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사람으로 사셨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모양을 입고 오신 사건만큼 '큰 위로'가 어디 있을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이 소망을 증언하고 드러내는 것이 사명이다. 그런 차원에서 성탄트리는 상처받은 백성들을 치유하는 소망의 사인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인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참된 교회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초림의 사인을 당시 전문 종교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의 사인을 깨달을 수 있을까?



장승권 목사 / 청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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