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다시!

[ 목양칼럼 ]

소종영 목사
2023년 01월 18일(수) 08:25
남유다는 두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거룩한 백성이니 망하지 않는다는 것과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두 가지가 동시에 틀어졌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망연자실, 할 말이 없다. 그런 이들을 앞에 두고 예레미야가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를 하는데,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다시' 시작할 힘을 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선언이요, 가능성의 다른 말이겠다.

교회 여자 집사님 이야기를 해보자. 5, 6년 전 신앙이 없던 시절 그녀는, 40대 중반의 아주 젊은 나이에 신장 이식수술을 받았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신심이 깊은 오빠(당시 안수집사, 현재 장로)가 매일 병원을 방문했고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눈물로 기도했다. 그런 오빠를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내가 살아난다면, 오빠가 믿는 예수 나도 믿어 보겠노라고. 그녀는 살아났고, 교회에 출석을 했고, 세례를 받았고, 집사가 되었다.

그러나 곧 코로나가 세상이 왔고 기저질환자인지라 백신을 맞지 못한 그녀를 코로나가 덮쳤다. 그리고 병원으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았다. 신장기능 마비에 폐렴증세까지 겹쳤으니 병원으로서도 더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교회는 눈물로 기도했고, 그녀는 '다시' 살아났다. 병원 관계자들의 입에서 기적 소리가 먼저 터져나왔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려는 순간, 눈을 떠보니 하늘에 반짝거리는 별들이 있더라고, 그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눈물이란다'라는 음성이 들리더라고, 결국 눈물의 기도가 자신을 '다시' 살게 했다고.

기도(祈禱)라는 단어는, 둘 다 '볼 시'(示)를 품고 있다. 이 단어는 원래 제단에 올려진 제물을 하나님께서 '내려다 보고 계시는' 형상이다. 그래서 신과 관련된 한문을 보면, 하나님을 뜻하는 '神(신),' 종교의 '宗(종)', 축복의 '祝(축)'과 '福 (복)'등 하나 같이 '볼 시'가 붙어 있다. 아무튼 기도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영역이라는 말인데, '祈(기)'에는 '도끼 근'(斤)이 '禱(도)'에는 '목숨 수'(壽)가 붙어 있으니, 기도란 다른 것 아니다. 도끼날이 나의 목을 위협하고 있는 것 같은 순간들마다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살려달라며 예수님께 나아왔던 나병환자든, 수로보니게 여인이든, 베데스다연못가의 장애인이든 하나같이 도끼날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다시'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시인 황선아는 '시든 꽃에 반하다'라는 시에서, "시들어가는 꽃을 보면 / 놀라지 않게 조심스레 다가가 / 입술에 닿은 깃털의 촉감 같은 목소리로 / '아직 햇빛이 반할 만하오'라고 / 속삭여주어야지"라고 노래했다. 아무튼 다시 시작하면 된다. 우는 이도, 주저앉은 이도, 떨어진 이도, 아픈 이도, 상처 입은 이도, 돈 떼인 이도, 앞이 캄캄한 이도, 길 나서는 이도, 꿈을 꾸는 이도, '다시 또다시' 시작하면 된다. 아직은 햇빛이 반할 만하다고 겨울 찬 바람 속에서도 살짝 고개 내민 햇살이 속삭이고 있으니.



소종영 목사 / 가장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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