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 철수 리' 운동, 고국의 스크린서 공개

'프리 철수 리' 운동, 고국의 스크린서 공개

10월 18일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 상영

최은숙 기자 ches@pckworld.com
2023년 09월 14일(목) 15:17
탕! 탕! 탕! 1973년 6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거리 한복판에서 중국인 갱단이 총격을 받고 사망한다.
5일 후 한 동양인 청년이 살인 용의자로 긴급 체포된다. 그의 이름은'철수 리'. 21살의 한인 이민자였다.

한국 이민사 중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으로 손꼽히는 '이철수 사건'이 50년 만에 스크린에서 공개된다.
오는 10월 18일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감독: 하줄리, 이성민)가 국내서 개봉한다.
이 영화는 2건의 살인 혐의로 억울하게 무기징역과 사형을 받은 이철수와 이철수의 구명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별한 직업 없이 차이나타운을 떠돌던 한 동양인이 거리에서 벌어진 총격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다.
경찰은 21살 청년 이철수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라인업에서 6명 중 3명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동양인 외모를 구별 못하는 백인 목격자들의 엉터리 증언으로 그는 '종신형 선고'를 받고 교소도로 수감됐다.

이후 1977년에는 교도소에서 재소자의 공격을 방어하다가 그를 살해해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한국인 이철수, 캘리포니아주의 부활된 새 사형법에 따라 10년만에 처음으로 사형에 처할 것'

새크라멘토에 사는 유재건 변호사와 미국 일간지 최초의 유일한 한국인 이경원 기자가 이철수를 만난다.
철수의 억울한 사연은 이경원 기자를 통해 '새크라멘토 유니언' 신문 톱기사로 게재되고 한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이철수 사건'의 재심을 주장하는 구명운동이 시작됐다.
이 운동은 미국 사법부의 인종차별적인 판결에 격분한 아시안아메리칸 커뮤니티를 통해 대대적인 '프리 철수 리 운동'으로 확대됐다.

1979년 1월 '이철수 사건' 재심 청구 명령
1979년 5월 '이철수 사형선고'
1982년 8월 재심재판 시작
1982년 9월 무죄
1983년 8월 24일. 살인 사건 무죄
10년 만에 모든 상황은 종결됐다.

사건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이철수 구명 운동의 중심에 섰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를 역임한 이문우 장로는 "이철수 사건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미국에 보냈다"면서 "철수에게도 우리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힘을 내라는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교회여성연합회는 교계 여러 단체와 연대해 후원금 5000달러를 모금하고 기도회를 열면서 구명 운동에 힘을 보탰다.
1983년 미국에서 이철수를 만난 이 장로는 "한국교회 어머니들이 너를 위해 기도 하고 있으니 건강하게 열심히 잘 살라고 말했었다"면서 "그를 한국에 초대 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두 번 다시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본보 전 사장 고무송 목사가 MBC PD로 활동할 당시 미국에서 직접 '이철수 사건'을 취재했으며, 교회여성연합회에 이철수 사건과 관련한 다양한 취재자료를 공유하며 이철수 구명운동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로는 지금 이 때에 이철수 사건이 국내에서 영화로 소개되는 이유에 대해 "당시 한국교회는 이철수 사건으로 하나가 됐다. 교단과 교파를 떠나 한국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됐다"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또다른 철수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돌보라는 의미는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든다"고 전했다.

이철수 사건은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을 보여주고, '프리 철수 리'운동은 미 사법부의 철옹성 같은 벽마저 무너뜨린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는 특별한 사례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인 하줄리 감독과 이성민 감독은 "이 중요한 사건을 더 늦기 전에 반드시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아름다운 동화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구명에 인생을 걸었던 수많은 이들은 상처를 받았다.
철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과 마약에 빠지면서 18개월을 다시 교도소에 복역했으며 방화사건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세상이 기억하는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린 후에야 그는 방황을 끝냈다. 2014년 62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마약퇴치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쉬운 점은 철수는 결국 끝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문우 장로는 "한 영혼을 구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철수 사건을 통해 알게 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하나되어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애썼던 그 시간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전했다.
최은숙 기자

당시 본보에 소개된 이철수 구명운동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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