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이 최순실로, 구국선교단과 십자군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로 "40년만에 재현된 국정농단"

"계룡산 도사가 최태민이 되다니..." 예장 총회 회의록과 고 탁명환 소장의 기사로 보는 "최태민" 장창일 기자l승인2016.11.03l수정2016.11.08 14:04l0호 l조회수 : 6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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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최순실의 뿌리는 그의 아버지 최태민이다. 2016년 국정농단의 시발점인 최태민이 '구국선교단'이라는 단체를 앞세워 중앙무대로 나섰던 1970년대 중반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구국선교단과 관계하지 말라"

▲ 통일교 및 구국선교단 가입교역자에 대한 규제요청을 결의한 내용을 담은 정치부 보고안. 이 안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 61회 총회에 보고돼 통과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총회장:이성희)의 당시 회의록을 보면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에 대한 우려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1975년 7월 31일 열린 59회기(총회장:이상근) 7차 임원회에서는 "통일교나 구국 선교단 등 교단이 인정하지 아니하는 집단에 가입하는 것을 금하며 그런 기관에서 발간하는 신문 및 잡지에 투고하는 일을 삼가도록 공보(기독공보)를 통해 공고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십자군 창군식'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구국선교단이 출범한 날이 1975년 6월 21일인 것을 감안하며 당시 총회의 '교류금지' 결정은 매우 신속한 일이었다.

구국선교단에 대한 경고성 결의는 계속 이어진다. 같은 해 12월 18일 열린 60회기 5차 임원회에서도 "구국선교단은 교단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교단 산하 교직자와 교우는 이에 관여하지 말라고 지시"하기로 결의했고, 11차 임원회에서도 제차 "교단 소속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통일교와 구국선교단에 가입함으로 교단 단합과 교회 사명에 장애가 오므로 이를 단호히 경고하되 각 노회장에 시달하고 기독공보에 공고하는 한편 총회에 건의한다"는 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담는다.

하지만 이같은 행정명령에도 불구하고 예장 총회 소속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구국선교단에 참여하는 일이 잦아들지 않았는지 구국선교단에 가입한 교역자들에 대한 규제안까지 통과된다. 60회기 임원회는 당시 총회장이던 한완석 목사 명의로 "통일교 및 구국선교단 가입교역자에 대한 규제 요청"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정치부로 보내 연구하도록 했다. 이 안건을 수임한 정치부(부장:김광현)는 61회 교단 정기총회에 "구국선교단은 교단과 관계없는 단체이므로 교단 목사는 구국선교단에 1) 가입하지 말 것이며 2) 가입한 자는 탈퇴하도록 노회에 지시해 주지케 할 것이며 3) 총회지시를 순응치 않는 목사는 해노회가 처벌하도록 한다"는 보고를 한다. 

▲ 총회 결의를 보도한 기독공보 1976년 9월 4일자 보도. 사이비종교 가입교역자 탈퇴촉구와 치리를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같은 총회의 결의에 대한 기사가 1976년 9월 4일 본보 1면에 게재됐다. 당시 기사는 총회 임원회의 결의를 담고 있는데 이에 대해 구국선교단이 본보에 명예훼손 운운하며 항의 서한을 보낸 일도 있었다. 특히 통일교와 구국선교단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결의를 했던 총회 임원회에 배석했던 림인식 목사가 지난 1일 총회 임원들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당시 통일교 및 구국선교단 가입교역자에 대한 규제 요청을 결의한 게 기독공보에 보도된 뒤 구국선교단 최태민이 우리 총회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일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모든 결의들이 구국선교단이 창립되고 불과 1년 사이에 내려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당시 임원회가 다루었던 내용들 중에는 '가입 자'들에 대한 치리가 주를 이루고 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참가자들이 많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교단 원로 등도 구국선교단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사료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 탁명환 소장이 본 최태민, "계룡산의 '원자경', 그 자가 최태민으로 돌변했다니"

▲ 계룡산에서 내려온 뒤 구국선교단 활동을 하던 시긴의 최태민

무려 4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최태민의 딸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지금, 1975년 해성처럼 등장해 전국적인 사이비 조직을 이끈 최태민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지고 있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단연구가인 고 탁명환 소장이 남긴 기사에는 최태민에 대한 자세한 관찰기록이 담겨 있다. 

현대종교 1988년 6월호부터 3회에 걸쳐 게재된 '대해부 구국선교단ㆍ구국십자군,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의 첫 장면은 계룡산에서 시작된다. '1973년 영세계 칙사관 교주 원자경', 바로 최태민이 목사로 둔갑하기 직전 계룡산에서의 직함과 이름이다. 이미 언론들을 통해 숱하게 보도된 것처럼 이 영세계는 불교와 기독교, 천도교의 교리를 섞은 신흥종교였고 최태민은 원자경이라는 이름으로 교주노릇을 했다. 하지만 탁명환 소장은 "그가 희한한 영력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한가지 특이한 일은 잡신을 섬기는 무당이 원 교주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고 벌벌 긴다는 사실이다. 처음 만난 무당도 그에게 절을 하고 그의 치료를 받으면 신기가 떨어져 무당업을 폐업하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볼때 그에게도 소위 영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사실"이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운명의 1974년이 시작됐다. 유신이 극에 달해 있던 이때 인혁당 사건이 일어났다.

▲ 계룡산 도사 시절 최태민이 지역신문에 낸 광고

2007년 이 사건이 조작됐다는 판결이 나면서 유신정권의 폭압정치의 단면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됐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안사건을 조작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엄청난 비난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의 사형집행이 이뤄진 1975년 4월 9일이 국제법학자회가 '사법 암흑의 날'로 지정할 정도로 국제사회의 우려는 상당했다. 같은 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는 문세광이 쏜 총탄을 맞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난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최태민은 영애에게 접근한다. 탁명환 소장의 글을 보자. "1975년 5월 교계 신문에 '대한구국십자군'의 기사가 실리고 총재는 최태민 목사라고 했다"면서, "교계에서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인물의 부상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원자경 그 사람이었다", "초라한 원자경 교주가 아니었다. 위풍당당하고 야무지고 건강한 모습으로 뭔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지금은 박 대통령의 영애 근혜 양과 함께 일한다고 하면서 청와대를 무단출입한다고 했다. 참으로 엄청나고 놀라운 일도 세상에 다 있구나. 그가 타고 온 짚차는 바로 근혜 양의 것이었다".

▲구국선교단에 드리운 박정희 대통령의 그림자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의 죽음 이후 불과 몇 개월만에 최태민은 영애를 만났고 전국 조직인 '구국선교단'을 조직했다. 구국선교단이 배제고등학교에서 창립행사를 가진 것이 1975년 6월의 일이었으니 고작 10개월만에 원자경은 최태민이 됐고, 또 목사로 둔갑했으며 반공을 기치로 내건 단체의 수장이 됐다. 

그리고 최태민의 옆에는 유신철권 시대를 연 장본인인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가 함께하고 있었다. 거칠 것이 없었던 막강한 권세를 1년이 걸리지 않아 손에 쥔 셈이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서울장신대 교회사 정병준 교수는 "모든 것이 당시 정권의 선택이지 않았겠느냐"고 말한다. 정 교수는 "최태민이라는 계룡산 무당이 불과 몇 달만에 이 모든 것을 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인혁당 사건으로 국제적으로 수세에 몰려있었고, 설상가상으로 WCC 등의 해외교회 네트워크와의 교류를 통해 사사건건 문제제기를 하던 한국의 교회들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을텐데 그 역할을 할 적임자로 최태민을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당시 박 대통령과 가까웠던 모 인사가 반WCC 그룹이자 백인우월주의 기독교인들의 국제 단체인 ICCC의 대표 메킨타이어와 접촉했다는 사료가 있다. 그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교회들을 견제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그 결과가 구국선교회로 나타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탁명환 소장도 정병준 교수와 비슷한 해석을 했다. "최 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 근혜 양을 만나면서부터 당시 저항 세력이었던 기독교계의 저항을 희석시켜 보려는 의도에서 (구국선교회와 쌍둥이 단체인) 대한구국십자군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체제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던 박 대통령은 당시 기독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근혜 양을 통해 알게된 최태민 씨의 종교정화 의견에 동조하게 된 것이었다", "(구국십자군 창설에 목사들이 참여한 것은) 한국 기독교가 남침위협을 내세운 독재권력의 시녀로 전락하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거짓말하는 아이와 같이 정권유지를 위해 부단히 북괴의 남침위협을 이용하였으며, 기독교마저 목사로 둔갑한 계룡산 교주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최태민에게 머리를 조아렸던 목사들,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처럼 난데없이 목사가 됐다고 주장하는 전직 계룡산 도사에게 엄청난 권력이 주어지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탁명환 소장은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최 씨는 권력의 후광을 업고 안되는 일이 없을만큼 종횡무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몇몇 유명 부흥사들은 설교 중 근혜 양과 얼마나 친한가를 과시한 사람들이 있어 듣는 이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권력의 언저리를 넘겨다 보고 기생하기 위해 성직자들이 앞을 다투어 근혜 양에게 접근하기 위해 최 씨 앞에서 설설기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리고 탁명환 소장은 '구국'과 '반공'을 앞세운 구국선교단의 최태민이 실제 이 단체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고스란히 적고있다. "'구국'에는 구호뿐이지 사실은 축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서 재벌급 기업인들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 일과였다. 항상 검은 안경을 끼고서 오만하게 앉아 재벌들에게 전화질을 하면서 꼭 근혜 양을 팔았다. '명예총재인 영애께서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협조 부탁한다'고 하면 재벌들은 모두 죽는 시늉까지 했다."

▲"모두 박근혜 양이 아는 일이다" 모르쇠로 일관했던 최태민

권세를 쥐었던 최태민은 10.26 뒤 드디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른다. 이에 대한 탁명환 소장의 기록. "10.26 사건이 일어나자 최태민 씨를 연행하여 조사가 시작되었다. 신촌의 S호텔과 청계천 7가의 S호텔에 수사본부를 정해 놓고 서울지검 도 모 검사를 책임자로 하여 수십명의 수사진들이 붙어 전국 규모의 조사를 했다. 엄청난 사건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외곽수사가 다 끝나고 증거까지 완벽하게 확보해 놓은 후 마지막으로 최 씨를 (다시) 불러 조사했다. 그때 돈 문제는 전부 박근혜 양이 아는 일이라고 잡아떼고 책임을 떠다 밀어버렸다고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근혜 양이 개입된 것으로 진술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살아 남았고 그 자식들까지 영애의 주변을 맴돌게 됐다. 그 마무리 짓지 못한 흑역사가 2016년 국정농단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에 남긴 상처도 크다. 이에 대해 탁명환 소장은 현대종교 기사에서 "온통 기독교계의 물을 흐려놓은 장본인들이 오늘도 일언반구의 회개조차 없이 아직도 지도자연하고 있다"며 한탄했다.

▲최태민이 최순실로, 구국선교단과 십자군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로

고 탁명환 소장이 기록한 최태민에 대한 기억은 2016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40년 전 최태민이 저질렀던 난장판이 바로 지금 그의 딸 최순실을 통해 국정농단으로 재현됐기 때문이다. 최태민이 최순실로, 또 구국선교단과 십자군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로 바뀐 점이 달라진 것이고, 영애에서 대통령으로 신분이 바뀐 박근혜 대통령이 늘 이들의 앞에 섰다는 게 공통점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일부이긴 하겠지만 교회의 역할도 동일하다. 결과적으로 죄인들을 지지한 것이다. 당시 목회자들은 구국선교단에 가입해 십자군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까지 받았고, 몇몇은 영애에 줄을 대기 위해 계룡산 도사 최태민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2016년의 교회의 모습을 어떤가. 몇몇 보수단체들과 관계자들은 여전히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하며 마치 박근혜 대통령에게 마지막까지 잘 보이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 구국선교단과 구국십자군에 대해 해부한 1988년 현대종교 기사.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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