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루터의 절제된 삶과 영적 고뇌가 느껴지는 곳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3> - 에어푸르트(Erfurt)와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 안재중 선교사l승인2017.01.03l수정2017.01.03 14:08l3073호 l조회수 :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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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어푸르트 대학과 루터

독일 튀링엔(Thuringen) 주의 주도인 에어푸르트(Erfurt) 구 시가지에는 지금 옛 시대에 뽐내던 위용을 여전히 자랑하는 성 마리아 대성당(St.Marien Dom)과 이에 마주해 서 있는 세베르교회(Severikirche)가 많은 방문객들을 불러 모으며 에어푸르트를 대표하는 기념물이며 첨탑의 도시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건물들이다.

에어푸르트에서는 1970년 이후 매년 11월 11일(내년에는 11월 10일에 마틴루터 탄생기념예배가 예정됨)이 되면 두 명의 마틴(Martin)를 위한 축제가 에어푸르트의 성 마리아 대성당 광장에서 열린다. 소위 에큐메니칼 마틴 축제(okumenische Martinsfeier)가 그것이다. 여기서 두 마틴은 가톨릭교회의 성 마틴(Martin von Tours)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말한다.

11월 11일은 성 마틴을 기념하여 등불을 밝히며 다니는 축제일이기도 하지만 그 날은 또한 태어난 지 하루 만에 마틴 루터가 성 마틴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날이기도 하다.

에어푸르트는 젊은 루터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마틴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에어푸르트 대성당에서 루터는 1507년 사제로 서품을 받는다. 그러나 에어푸르트에서 마틴 루터는 단지 수도사로서만 기억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그는 학문적 방법과 기초를 닦는 대학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어푸르트는 종교개혁자 이전의 루터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현재 에어푸르트 시는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 안내하는 2시간짜리 관광 프로그램을 준비해 놓고 있다.

루터 시대에 인구 2만명(현재 20만명)이 살던 에어푸르트는 90개 이상의 교회와 36개의 수도원들이 즐비했다. 뿐만 아니라 상업도시로서 신성로마제국의 가장 중요한 제국도시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14세기와 15세기 유럽에 급격하게 불고 있던 교육혁명의 한 장소로서, 독일어권에서는 체코의 프라하(1347/8)와 오스트리아 비엔나(1363) 다음으로 대학(1379)이 세워졌던 도시이다. 이는 하이델베르크(1385)나 쾰른(1388)보다 앞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에어푸르트는 독일에서 가장 먼저 대학(Hochschule)이 세워진 곳이다. 루터 당시 에어푸르트 대학은 윌리암 옥캄에 기인하는 '유명론'이 수정된 형태로 가르쳐진 '새로운 길'(via moderna)의 아성(牙城)이었으며, 인문주의의 중심지였다. 이 에어푸르트 대학은 루터에게 다른 곳이 작아 보일만큼 유명해져 있었다.

마틴 루터는 신앙과 교육에 열심이었던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에어푸르트에서 공부하게 된다. 1501년 루터는 17살의 나이에 에어푸르트 대학에 입학한다. 지금도 에어푸르트 시문서기록물에 보관중인 1501년 대학 학생 명부에는 'Martinus Ludher ex Mansfeld (만스펠트 출신 마틴 루더)'라고 기입되어 있는데. 이것은 루터의 삶에서 아마도 가장 이른 친필 기록일 것이다.

마틴은 열심있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는데, 3학기 후인 1502년에 루터는 57명 중 30등으로 학사과정(Baccalaureus)을 마치고, 이어서 1505년 1월에 17명중 두 번째 좋은 성적으로 석사학위(Magister)를 취득한다. 하지만 그의 공부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21살이 되던 1505년 루터는 여름학기에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본인에게는 낯선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2. "성 안나여, 도와 주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에어푸르트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30여 분 가량 달리면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 인생의 전환점이 이루어진 장소인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을 찾아갈 수 있다.
이 날은 1505년 7월 2일로 전해진다.

만스펠트에 있는 부모님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마도 부모님과 법학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를 놓고 다툼이 있었던 것같다. 많은 루터 관련 연구서들은 이 싸움으로 루터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신 속에서 에어푸르트 입구에 있는 마을 스토테른하임을 지나는 중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속에서 루터는 일종의 자신의 미래를 향한 계시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성 안나여, 도와주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Hilf du, heilige Anna, ich will ein Monch werden!)." 이 고백은 수십 년 후에 루터 자신이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탁상담화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비록 중세의 미신적 신앙에 의해 광부들의 수호신인 성 안나에게 단발마의 비명처럼 내지른 말이었지만, 단지 이것이 천둥번개가 무서워 엉겁결에 튀오나온 말이었을까? 교회법에 따르면 위급한 상황에서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었다. 꼭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루터는 이것을 지켜야 할 의무를 느꼈다. 갑작스런 맹세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큼 무시무시한 낙뢰의 경험이 수도사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고민해 오던 구원의 문제와 이를 위해 수도사로의 삶을 강행하게 했던 것이다

스토테른하임에 세워진 기념비엔 "성스러운 땅. 종교개혁의 전환점. 하늘로부터 온 섬광 가운데 젊은 루터에게 이곳에서 길이 지시되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3.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다: "세상을 등짐(Der Welt abgestorben)"

에어푸르트 중앙역에서 걸어서 약 20분 가량 거닐면 개신교 어거스틴수도원을 찾아 갈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여느 수도원처럼 매번 기도시간들이 있지만 이곳은 이제 객실을 준비한 호텔 수도원이다. 루터의 향기가 가득한 채로 이곳에서 친절한 직원이 루터의 흔적을 찾는 방문객들과 손님을 맞이한다.

1505년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피해서 도망치듯 루터는 에어푸르트의 어거스틴 은수자수도원(Augustinereremiten Kloster)에 입회한다. 번개를 만난 지 14일이 지난 시간이었다. 이후 1521년까지 루터는 수도복을 입고 전형적인 어거스틴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처럼 머리 중앙부분을 삭발한 한 채 살았다. 5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지냈던 에어푸르트 수도원은 청년 루터에서 종교개혁자로의 전환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루터는 왜 다른 수도원이 아닌 어거스틴수도회의 수도원을 선택했을까?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에어푸르트에는 시토수도회나 도미니칸 수도회 그리고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있었다. 루터는 아이제나흐에 있을 때 이미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검은 수도원'(Schwarzes Kloster)이라고 불리는 어거스틴 은수자수도원을 선택했다.

아마도 그 수도원이 당시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배웠던 학문적, 철학적 방법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동일한 노선에서 공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루터에게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 하나로 어거스틴수도회가 당시 개혁수도원으로서 어느 수도회보다 엄격한 규율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루터는 누구보다 수도적 삶에 열심이었다. 그는 스스로 한 번도 수도원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었다. 15년 넘게 엄격한 규율에 따른 금욕적 수도생활을 지키면서 해왔던 수도원 생활은 루터의 건강을 해쳤을지 모른다. 루터는 오랫동안 담석증으로 고생하고, 협심증으로 죽었다. 루터는 의식적으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행을 하는 삶을 선택했다.

구원을 향한 몸부림이었으리라. '인간의 행위들이 영혼 구원을 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면, 자신의 온갖 수고 가운데 있던 한 젊은 수도사는 그가 파멸을 모면하게 될 것을 어떻게 확신해야 할까?' 이런 고뇌에 찬 영혼이 극단적 고행을 통해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구원문제 출구를 발견하게 된 것은 루터의 영적인 스승이자 당시 어거스틴수도회 종단 부총장으로 있던 요한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와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고해성사 신부였고, 루터로 하여금 신학 박사 루터가 되도록 인도해주었다. 무엇보다 요한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참 구원자를 만나게 해주고,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몰두하게 만든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Solus Christus)라는 종교개혁적 모토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루터는 슈타우피츠를 만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나님은 이런 예비된 만남을 통해 종교개혁자 루터를 준비시키신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지금도 개신교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루터의 수도원 삶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전시실을 꾸며놓았다. 그가 입었던 수도복, 그가 살았던 작은 방, 그가 거닐었던 복도와 길들을 상상해 보면서 수도원 이곳 저곳을 둘러보니 어느덧 젊은 루터의 절제된 삶과 영적 고뇌가 느껴지는 듯하다.

2017년에도 이곳은 각 계의 전문가들을 통해 매 달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들이 즐비하게 계획되어 있다. 하루 정도 머물며 수준 높은 강연도 듣고, 고뇌하는 영혼 젊은 루터의 발자취도 느껴 본다면 어떨까? 혹시 나를 위해 준비된 슈타우피츠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 아닌가!


안재중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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