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종교개혁을 작품으로 기록하는 축복을 누리다 손창근 선교사l승인2017.03.21l수정2017.03.21 14:10l3084호 l조회수 :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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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 루터의 얼굴이 오늘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쏟아져 나오는 책자와 각종 행사 안내 포스터 속에서 루터의 얼굴을 쉽게 만나기 때문이다. 루터의 젊은 시절과 중년 시절의 얼굴뿐 아니라, 그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의 모습과 루터의 부모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루터와 그의 가족 초상화를 남긴 한 사람의 화가 덕분이다. 바로 루카스 크라나흐(Lukas Cranach)이다.

그는 루터의 주 활동 무대였던 비텐베르크에서 47년동안 살면서 작센 선제후의 궁정화가로써 명성을 떨쳤다. 비텐베르크에서 그의 활약은 후에 역시 화가로 활동한 그의 아들에게까지 이어졌는데, 아들 이름이 아버지와 똑같아서 이 둘을 서로 구분하기 위해 각각 '부친 루카스 크라나흐'(Lukas Cranach der Altere),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Lukas Cranach der Jungere)로 부르고 있다. (이 글은 부친 크라나흐에 관해 쓰므로 달리 표시하지 않기로 한다)  

크라나흐는 1472년에 독일 크로나흐(Kronach)에서 출생했다. 크로나흐는 에어푸르트와 뉘른베르크 중간쯤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로, 현재는 주민 수가 1만 7000명 정도 되는 소도시이다. 부친의 이름은 한스로 알려져 있는데, 성은 달리 알려져 있지 않고 기록에 보면 '화가 한스'로 되어 있다. 그의 부친이 (무명)화가였으니 명성은 물려 받지 못했을지라도 재능은 틀림없이 물려 받았을 것이다. 크라나흐는 루카스라는 자기 이름에다가 출생지를 자기 성으로 정했다. 그때만 해도 귀족이나 유력인사들이 주로 성을 사용했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성을 정하거나 바꿀 수가 있었다.

크라나흐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아마 부친 밑에서 화방 일을 도우며 그림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가 다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빈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였다. 당시 독일어 권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빈에서 크라나흐는 1502년부터 약 3년간 화가로 활동한다. 여러 저명인사의 초상화를 부탁 받아 그렸고, 주목 받을 만한 종교화를 남겼다. 시골 청년이 미래를 내다보고 빈을 찾아 간 것을 보면 그의 야심 찬 삶의 열정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잘 입증되고 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바야흐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물결이 알프스를 넘어 독일에 퍼지기 시작한 때였다.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선두주자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가 이미 활동 중이었고, 크라나흐 역시 막 꽃피기 시작한 이 새로운 시대 정신에 합류하게 된다.

1505년은 크라나흐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해였는데, 작센의 선제후인 현자 프리드리히가 그를 궁정화가로 비텐베르크로 불렀기 때문이다. 당시 비텐베르크는 중세 시대에 가장 현대적인 도시 중에 하나로 막 태어나는 중이었다. 1502년에 프리드리히에 의해 대학이 세워졌고, 대학을 중심으로 학문과 사상의 집결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예술을 열정적으로 장려한 프리드리히에 의해 예술가들까지 합류하게 되면서 비텐베르크는 당시 어느 대도시보다 더 강한 진보적인 열기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겨우 인구 2500명 밖에 안되는 소도시 비텐베르크였지만 결국 세계를 움직인 종교개혁의 요람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 크라나흐도 적잖은 기여를 하면서 '종교개혁 화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궁정화가로 부름받아 비텐베르크에 온 크라나흐는 당시에 모든 궁정화가가 그렇듯이 상당히 많은 업무를 맡게 된다. 그림뿐 아니라 곳곳에 세워지는 성과 같은 큰 건물에 실내 장식과 도색을 책임지고, 문장이나 메달 제작, 심지어 궁중의상과 소품 제작까지 관여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역시 선제후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선제후를 비롯한 중요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선제후가 참관한 경기 대회나 사냥 장면 같은 것도 그림으로 남겼다. 궁정화가로서 크라나흐는 선제후 곁에 매우 가까이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많은 업무 속에서도 빠른 속도로 다작을 할 수 있는 화가였다. 빠르게 많은 작품을 그릴 수 있는 것은 그의 탁월한 재능에 기인한 것이지, 그렇다고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다 크라나흐는 보통 예술가와는 다른 기질이 있었는데, 바로 사업가 기질이었다. 그에게 있는 예술혼과 경영 마인드가 결합됨으로써 그의 삶은 매우 독특한 궤적을 그리게 되었다.

그는 비텐베르크에 온 후 도시 중심인 시청 바로 맞은 편에 주택을 구입하였고, 계속해서 인근 주택과 대지를 구입하게 된다. 1520년대에 가면 이미 크라나흐는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가 재산을 일구는 데는 약국 경영도 한 몫을 했다. 크라나흐는 비텐베르크에서 최초로 약국을 세워 독점적으로 경영하였다. (그 약국은 지금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크라나흐 약국'이라는 이름으로 영업 중이다.) 크라나흐는 다섯 채의 주택, 약국, 인근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화가로써 화방을 경영할 뿐 아니라, 인쇄소도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비텐베르크 교수들이 책을 만들 때 라이프치히까지 가서 인쇄했으나, 크라나흐의 인쇄소가 생기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루터의 중요한 책들과 최초의 루터 성경도 모두 크라나흐의 인쇄소에서 만들어졌다. 더구나 책의 삽화로 크라나흐의 목판화를 주로 사용했으니, 모든 작업이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최고의 효율성을 지니게 되었다. 1534년에 루터가 번역한 신구약 성서가 인쇄되었는데 여기에는 크라나흐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탁월한 목판화 117개 작품이 함께 들어있다. 

또 한가지 언급할 것은 크라나흐가 정치가로써 역할한 점이다. 선제후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써 예술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영향력이 큰 그에게 정치적인 역할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비텐베르크에는 21명의 시의회 회원이 있었는데, 7명씩 돌아가면서 1년씩 재임하였다. 크라나흐는 1519년부터 1549년까지 무려 30년에 걸쳐 비텐베르크 시의원으로 전부 10년간 재임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3년은 시장으로 재임하였다. 그 기간 동안 작센의 선제후는 세 사람이나 바뀌었지만, 그는 변함없이 궁정화가 직에 유임되었다. 혹자는 이런 예술 외적인 왕성한 활동 때문에 그가 어떻게 예술의 깊이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는 의혹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보면 그것이 선입견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크라나흐의 전체 작품을 디지털화 작업한 Cranach Digital Archive 웹사이트를 통해 그의 작품을 매우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당시의 모든 시민들이 그러했듯이 크라나흐에게도 교회와 신앙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 그에게 비텐베르크의 또 다른 명사인 마르틴 루터는 중요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종교개혁의 측면에서 볼 때 가히 축복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빠르게 친해졌다. 루터는 1520년에 크라나흐의 딸 안나가 세례 받을 때 대부가 되었다. 크라나흐는 1525년에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사건이었던 루터의 결혼식에 증인(Trauezeuge)이 되었다.

루터가 1521년 보름스의 제국회의가 끝나고 나서 극비리에 납치극을 가장해서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하게 되었을 때, 크라나흐는 이미 루터의 편지를 통해 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크라나흐는 루터가 수염을 잔뜩 기른 채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으로 지내던 때의 모습을 초상화로 여러 장 남길 수 있었다.

크라나흐는 루터와 멜랑히톤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루터 부부의 초상화도 상당 수 남겼다. 또한 여러 제단화와 작품들을 통해 종교개혁이 주창하는 바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인 마르고트 캐스만(Margot Kaßmann)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글로 표현했다면 크라나흐는 신앙을 그림으로 해석하고 표현해서 확산시켰으며, 루터를 종교개혁의 아이콘으로 만드는데 큰 몫을 한 사람이 바로 크라나흐였다"고 하였다.

1547년 슈말칼덴 전투에서 비텐베르크가 카를 5세 황제 군대에 함락되면서, 크라나흐도 궁정화가의 직을 잃게 된다. 그후 1552년에 딸이 살고 있던 바이마르로 옮긴 크라나흐는 이듬해 1553년 10월 16일 세상을 떠나 바이마르의 야곱공동묘지(Jakobsfriedhof)에 안장되었다. 

격정의 시대에 태어나 주어진 재능과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한 크라나흐는 독일 르네상스 미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틀림없지만, 루터와 개혁자들을 만남으로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역사를 작품으로 기록할 수 있는 축복을 누렸다. 그는 결국 종교개혁을 그린 화가가 되었다. 

비텐베르크를 방문하면 크라나흐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다음 세 곳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세 곳 모두 도시 중심인 시청 광장에 가까이 붙어 있다. 먼저 두 곳은 크라나흐가 생전에 구입했던 주택들인데, 하나는 시청 바로 맞은편에 마르크트 4번지(Markt 4)에 있는 오렌지색 5층 건물인 '크라나흐 하우스'이다. 이곳에서는 '크라나흐의 세계' (Cranachs Welt)라는 상설 전시가 열리고 있다. 

다른 한 곳은 시청 광장에서 성 쪽으로 몇 발자국만 더 가면 나오는 '크라나흐 호프'(Cranachhof)이다. 주소는 슐로스슈트라세 1번지(Schlossstrasse 1)인데, 흰색 건물 좌우에 '크라나흐 약국'(Cranach Apotheke)과 '크라나흐 숙소'(Cranach Herberge)라고 적혀 있다. 크라나흐가 실제로 살았고 루터도 종종 방문했던 이 건물은 현재 개조해서 개성 있는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 한 가운데 아치형으로 뚫린 통로로 들어가면 넓은 뜰이 나오고 뜰 안쪽에 오렌지색 건물이 나온다. 이곳에는 크라나흐 당시에 인쇄소를 재현해 놓고 방문자들이 실제로 중세 시대의 인쇄술을 흥미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마지막은 시청 광장 동편에 있는 비텐베르크 시교회(Stadtkirche St.Marien)인데, 교회 제단에 유명한 크라나흐 제단화가 있다. 중앙 판넬에는 성만찬 그림이 있는데, 그림 오른쪽 아래 편에 제자들 사이에 있는 루터와 아들 루카스 크라나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손창근 선교사
독일 하노버 본향교회


손창근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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