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9> - 루터와 츠빙글리가 유일하게 단 한번 만난 도시, '마부르크(Marburg)'

성찬논쟁은 개신교의 분열로 … 500년 후 분쟁 극복, 강단교류 서은성 선교사l승인2017.06.21l수정2017.06.23 11:15l3096호 l조회수 : 970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현재 독일에서는 크고 작은 많은 도시들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행사들을 한창 진행중에 있다. 마부르크(Marburg)에서도 2016년 10월 31일부터 2017년 10월 31일까지 1년 동안 다양한 행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특히 2017년 6월 15일부터 18일까지는 마틴 루터(1483~1546)가 마부르크 성 (Marburger Schloss)까지 올라갔던 그의 흔적을 따라 직접 체험하는 특별 프로그램도 예정하고 있다. 이 글이 게시된 시점에선 이미 끝나있으리라.

이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마부르크시를 따라 흐르는 란강(Lahn Fluss)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영주가 살았던 마부르크 성까지 매우 가파른 길을 걷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 당시 마부르크 인구 수는 약 3500명이었고 현재의 인구 수 약 8만 명 밖에 안 되는 작은도시이지만 학생 수는 2만 7000명에 달하는 대학도시이다. 특히 500년 역사를 지닌 마부르크대학(Philipps-Universitat Marburg)은 지금도 여전히 그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 대학의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20세기 신약학자 불트만(R. Bultmann, 1921~1951년, 30년 동안 교수로 재직)과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의 홍보대사이며, 독일 기독교 전 총회장이었던 마곳 캐스만(Margot Kaßmann) 여성목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529년 마부르크 종교회담
성찬논쟁, 개신교분열
1529년 9월 30일 목요일, 40명의 헤센(Hessen)주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루터가 마차를 타고 마부르크 시내 광장으로 들어왔다. 이미 종교개혁자로 유명해진 루터를 보려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마부르크 시민들과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상상해 보라!

루터는 멜랑히톤과 함께 마부르크 종교회담(Das Marburger Religionsgesprach)에 참석하기 위해 비텐베르크를 떠나 2주에 걸친 여행 끝에 이제 막 도착했던 것이다. 루터의 일행들은 여기서 10월 5일까지 머물렀다.

루터의 떠들썩한 입장과는 달리 츠빙글리(Ulrich Zwinglich, 1484~1531)의 마부르크 여행은 극히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평소에도 루터와의 대화를 원했던 츠빙글리는 마부르크회담에 참석을 열망했음에도 참석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왜냐하면 츠빙글리를 도왔던 취리히 시의회가 그의 마부르크 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마부르크가 취리히에서 너무 멀고 그래서 도중에 로마카톨릭 세력의 암습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온갖 위험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시의회의 허락도 없이, 심지어 부인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마부르크를 향해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그는 로마카톨릭의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을 타고, 동료의 도시 바젤과 스트라스부르그를 지나 4주만에 마부르크에 왔는데 위험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츠빙글리가 루터보다 오히려 3일 먼저 마부르크를 도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루터와 츠빙글리는 마부르크에서 그들 생애의 단 한 번의 역사적 만남을 가졌던 것이다.

애초 루터는 이 회담 참석에 소극적이었다. 원래 자기 주장이 강했던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타결될 전망이 없었기에 이 회담엔 위험성이 있다고 의견을 피력하며 초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마부르크 영주인 필립이 누구인가? 헤센의 그 젊은 청년은 매우 적극적이며 계획대로 그의 뜻을 관철할 것이다. 이 헤센의 영주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제후들에게 떠별려놨기 때문에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쩔수 없이 루터는 그의 간곡한 요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는 갈아입을 옷 얼마를 꾸려 가방에 넣고 마부르크로 향하는 마차를 타야만 했던 것이다.
마부르크 종교회담은 1529년 10월 1일부터 4일까지 진행되었는데, 이를 기획하고 주최한 사람은 그 성의 젊은 영주 필립 폰 헤센(Philipp von Hessen, 1504-1567)이었다. 필립은 마부르크시의 종교개혁사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521년 만 16세일 때 보름스의회에 갔다가 거기서 루터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 다음 해인 1522년부터 그는 종교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524년에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마부르크에 적용하고 실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1526년 슈파이어의 제1차 의회의 결정 - 제후와 도시는 신앙의 문제를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음 - 이 있은 후, 필립은 마부르크에 개신교 목사를 청빙하여 사역하게 하였다. 아울러 마부르크에 있던 여러 수도원들을 해체시키면서 생긴 수입으로 1527년에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세계 최초의 개신교 대학을 건립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성 마부르크가 개신교의 새로운 영적, 정신적인 중심지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필립은 마부르크 종교개혁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임은 물론, 나아가 유럽의 종교개혁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29년 슈파이어 제2차 의회에서는 1526년 제1차의 결정을 철회하고 보름스 칙령을 새로이 엄수하도록 결정하였는데 이때 6명의 선제후와 14개 도시의 대표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회의 결정에 저항(Protest)하였다.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가 개신교를 의미하는 단어가 된다. 이들 가운데는 필립도 있었는데 그는 개혁에 저항하는 가톨릭과 또 과거보다 더 힘이 강력해진 합스부르그(Habsburg) 황실의 권력에 맞서기 위해선 더 강력한 종교개혁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 주변의 상황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1520년 중반부터 이미 몇 년 동안 서로 서신을 통해 라틴어와 독일어로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해왔다. 급기야 1527년에 이들은 성찬에 대한 치열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논쟁에서 주로 공격자였던 루터는 츠빙글리를 이단자로 비난했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루터와는 달리 공격적인 자세를 자제했으나 다른 신학적인 문제에서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주장을 양보하지 않았다. 성찬논쟁은 신학적인 입장 뿐 아니라 종교개혁 운동의 방향까지도 나누어지게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필립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찬에 대한 논쟁이 현실적으로 지나치게 소모적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개신교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뿐이며, 심지어 정치적으로 불리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평소 황제가 두려워하는 스위스 개혁자들이 지닌 군사력의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절감하며, 모든 개신교의 힘을 한 데로 묶을 전략을 세웠다. 그 일환으로 필립은 논쟁으로 인해 서로 대적하는 종교개혁자들을 중재하기 위해 루터와 츠빙글리를 비롯하여 당대에 종교개혁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자기가 살고 있는 마부르크 성으로 초대하여 두 줄기의 견해를 하나로 조율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일치에 이르지 못한 대참사
처음 분위기의 주도권은 루터가 쥐고 있었다. 그는 마부르크 종교회담에 참석코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온 부쩌(Martin Bucer, 1491~1551)에게 농담으로 인사할 정도였던 반면에 츠빙글리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필립은 초대된 모든 인사들에게 영주의 성에 머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였고 그 동안 개혁자들이 신학적 논점을 합의하도록 노력하였다. 여러 논쟁 중에 가장 뜨거운 것은 역시 성찬논쟁(Abendmahlsstreit)이었는데 때문에 거기에 회담하는 나흘 중 절반인 이틀 동안 성찬에 대한 집중적인 논쟁이 진행되었다.

이 논쟁의 주 당사자는 역시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바젤에서 온 외코람패드 (Johannes Oekolampade, 1482-1531)였는데, 그 종교회담에 참석한 방청객에는 마부르크 시민들과 대학생들도 많았을 정도로 뜨거운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회담테이블에 츠빙글리와 마주 앉은 루터는 가방에서 분필을 꺼내어 자기와 츠빙글리 사이에 놓여있는 테이블의 덮개를 벗기고 책상에 마태복음 26장의 말씀, "이것은 나의 몸이다"를 기록한 다음, 조용히 다시 테이블 덮개를 덮었다. 즉 이 말씀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래서 믿음안에서 문자대로 받아들여야만 하고 성찬예식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이다 즉, 성찬이 진행되는 동안 예수는 실제로 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 가운데 현존한다고 주장했다.

루터와 달리 츠빙글리는 "이것은 나의 몸이 아니라, 나의 몸을 의미한다"고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몸과 피가 된다는 루터의 주장을 미신으로 간주하였다. 루터는 츠빙글리의 논리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재차 공격하였다.

그는 덮개를 뒤로 젖히며 좀전에 기록한 내용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텍스트는 바위처럼 견고하다." 츠빙글리는 복음서 도처에서 나타나는 비유들을 예로 들면서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의 의미는 예수가 실제로 포도나무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며, 또 신자들 모두가 실제로 가지로 변한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 "이것은 나의 몸이다"의 의미도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질 뿐이기 때문에,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기념설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덧붙여 루터의 설교는 자연과학적으로 수용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박했으며 복음서에서 하늘로 승천한 예수님이 하늘과 세상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비이성적인 것을 믿도록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빵이 살로 변하지 않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아주 명백한 증명으로 "고기 맛이 나지 않는 것은 고기가 아니다"고 말했다. 카톨릭의 화체설이든 루터가 주장하는 성찬론이든, 성찬에서 빵은 계속해서 빵맛이고 포도주는 계속해서 포도주 맛이다라는 것이다. 그러자 루터는 다시 테이블보를 들추었다.

츠빙글리의 성찬에 대한 '어떻게'라는 질문과 '왜'라는 질문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적하는 불경한 것이며,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그 말씀 그대로라고 되뇌었고, 츠빙글리 역시 '고기 맛이 아니면 고기가 아니다'라고 간단한 문장만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자기 가방 속에서 분필을 다시 꺼내는 대신에 칼을 꺼내어서 자기와 츠빙글리 사이에 덮여진 테이블보를 둘로 잘라냈다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더이상 토론이 진행될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루터는 논쟁 상대방에게 그래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에 감사인사를 전했고 자기의 날카로운 언행에 대한 깊은 이해를 구했다.

루터의 경건한 행동에 감동을 받은 츠빙글리는 그에게 호의의 손을 내밀면서 성찬에 대해 일치하지 못한 것은 앞으로 위험성이 있다고 말하자, 루터는 다시 태도를 바꾸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비시오." 그런 상황에서 츠빙글리는 루터를 향한 호의의 손길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회담은 결렬되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임재방식 불일치로 결말 지어져
필립이 주선한 종교회담은 기대했던 성찬문제는 일치에 이르지 못하는 대참사였다. 그는 15개의 마부르그 조항(Maburger Artikeln)에 양쪽 다 서명하도록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15개중 14개 조항은 일치에 도달했지만, 성찬에 관한 마지막 15번째 조항에서 그들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임재의 방식에 일치하지 못했다.

결국 루터는 성찬제정 말씀을 문자적으로, 츠빙글리는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더욱 확고히 한 것으로 막을 내렸다. 종교개혁사적으로 볼 때, 마부르그 15논제는 루터와 츠빙글리가 함께 서명한 종교개혁의 유일한 고백문서로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일하게 하나 밖에 없는 문서의 원본은 마부르그 시의 문서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한국교회의 분열 역사, 역시 500년이란
길고 긴 시간이 흘러야 가능할 것인가.
마부르크회담에서 해결되지 못한 성찬논쟁은 마침내 개신교의 분열로 이어졌다. 루터를 따르는 루터파(lutherisch)와 츠빙글리를 따르는 개혁파(reformiert, 후에 칼빈에 의해 확대됨)의 분열이 그것이다. 그 이후로 여러 차례 화해의 시도가 있었으나 계속 무산되었다가, 수 백 년이 지난 1973년 로이엔베르그 합의서(Leuenberger Konkordie)에서 마침내 루터파와 개혁파들은 성찬론에 대한 분쟁이 극복되어졌고 서로 성찬예식을 함께 거행하고 강단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분열의 역사를 보면서 마부르크 종교회담 결렬이 500년 지나서야 서로 분열되었던 부분이 극복되어지고 화해를 이루어 함께 연합하여 사역을 하는것처럼, 우리 한국교회의 화해도 500년이란 길고긴 세월이 흘러야 가능할까?


서은성 선교사  
<저작권자 © 기독공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여백
한국기독공보 사람들기사제보광고안내광고검색지사장모집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청소년보호정책새 생명 새 빛 운동
한국기독공보  |  등록번호: 서울, 아0429  |  등록일: 2016년 12월 22일  |  발행인: 이성희  |  편집인: 천영호
발행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1402호(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  청소년보호책임자: 차유진
편집국: 02) 708-4713~6 /4720(fax)   |  총무국: 02) 708-4710~2 /4708(fax)   |  광고국: 02) 708-4717~9 /4707(fax)
Copyright © 2004 - 2017 한국기독공보. All rights reserved. 외부필자의 원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