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보코'의 속삭임 앞에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맹을 준비하라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10> - 루터, 천년고도(古都)에 승리의 씨앗을 뿌리다 정수길 선교사l승인2017.07.26l3101호 l조회수 :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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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아우크스부르크'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에 속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는 주전 15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군단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건설되었다.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인 푸거라이(Fuggerei)로 유명한 아우크스부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교회사에서도 의미 있는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루터의 신학과 신앙을 28개조로 압축한 루터교의 기본교리인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과, 신성로마제국 내의 모든 영주에게 신교와 구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하여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1555년)가 이루어진 곳이 아우크스부르크이다. 이 도시와 루터의 직접적인 관련은 추기경 카예타누스와의 논쟁이다. 

'폭풍전야'
중세교회에서는 죄를 범한 죄인이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고백하면 사제의 사죄선언으로 내세에 받을 벌에 대해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세의 벌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면죄부를 구입하면 현세의 벌도 용서받을 수 있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성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선을 행하였으며 면죄부를 배분할 수 있는 '공덕의 보물창고'를 축적하였다고 가르쳤다.

교회는 또한 연옥에 대해 가르쳤는데, 성인(聖人)이 죽으면 곧바로 천국으로 가고 죄인들은 지옥으로 가는 반면, 죽음에서 구원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남은 죄과를 갚기 위해 중간 장소인 연옥으로 간다는 교리였다. 이때, 성인들의 여분의 공로를 통해 연옥에 있는 죄인을 구해낼 수 있다고 하였다.

독일 브란덴부르크의 감독 알브레히트는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마인츠 대교구를 손에 넣으려는 야심이 있었고, 교황 레오 10세는 자신의 사치와 향락으로 바닥을 보이고 있던 교황청의 금고를 채우고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완공하기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이에 두 사람은 거래를 통해 알브레히트에게 교구를 넘겨주며 교구 내에서 면죄부를 판매할 수 있도록 하고 수익의 절반을 교황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알브레히트는 수도사 요한 테첼에게 독일에서의 면죄부 판매책임을 맡겼다. 그는 온갖 속임수와 감언이설로 면죄부를 팔았는데, 면죄부를 판매하는 자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효력이 있다고 했으며, 동전이 궤짝 속에 '딸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그 영혼은 연옥에서 튀어 오른다고도 했다.

'타오르는 개혁의 불길'
이같은 테첼의 궤변은 교회 안에 가득한 무지와 미신과 부정부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루터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분노하였다. 95개 조항이 나오기 1년 전인 1516년 10월 31일, 공개적으로는 처음으로 행한 설교에서 루터는 면죄부 문제를 언급하였다.

루터는 고해성사를 듣는 데에 익숙한 사제의 입장에서 면죄부 문제가 그의 양무리에게 야기한 끔찍한 결과들을 발견한 것이다. 면죄부에 대한 첫 설교를 한지 꼭 일 년 후인 1517년 10월 31일, 만성절(Allerheiligen) 하루 전 날에 루터는 이 문제를 다시 다루었다. 루터는 신학자들에게 이 문제를 일깨울 의도로 면죄부의 효능을 묻는 95개 조항을 라틴어로 작성하였다. 

면죄부와 고해성사를 주로 다룬 95개 조항을 통해 루터가 어떤 새로운 교리를 제시한 것은 아니었으며 면죄부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온건하였다. 루터는 면죄부가 신자의 영혼구원과 성화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의해 인류를 죄에 대한 모든 형벌에서 자유케 하셨다. 이같은 루터의 선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선포였다.

95개 조항이 널리 퍼지면서 파문이 커지자 교황청에서는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가 우선 자체적으로 수습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1518년 4월 26일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총회에 참석하였다. 하이델베르크 총회에서 루터는 면죄부 문제는 가급적 피하는 대신 자신의 신학의 기초가 되는 '십자가 신학'을 설명하는데 주력하였으며 총회에 참석한 많은 수도사들이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였다. 루터는 지지자들과 동료들의 환송을 받으며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아우크스부르크의 루터'
1518년 8월 7일, 루터는 로마에 출두하여 이단과 명령불복종 혐의에 답변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자 루터는 이 사건이 로마로 이송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프리드리히 선제후(選帝侯)에게 호소하였다. 선제후와 교황청 간의 협상을 통해 루터 청문회는 로마가 아닌 독일의 보름스에서 개최하기로 합의되었다.

한편, 1518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교황 레오 10세는 추기경 카예타누스를 자신의 사절로 파견하였다. 카예타누스는 당시 서유럽을 위협하는 터키인들에 대항하여 독일 영주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카예타누스에게 루터에 대한 보름스 청문회에 앞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먼저 비공개 청문회를 열자고 제안함으로써 루터와 카예타누스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막시밀리안 황제로부터 루터를 위한 면책특권을 받아 내었다.

비록 황제의 안전통행증을 받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하는 루터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과연 살아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올 수 있을지 염려할 정도였다. 도중에 장염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하고 반대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한 루터는 1518년 10월 7일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하여 성 안나교회(St. Anna Kirche)에 여장을 풀었다.

'카예타누스와의 논쟁'
카예타누스는 1518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사흘에 걸쳐 세 차례 루터를 면담하였다. 첫날은 루터가 최대한 경의를 표하며 교황의 사절 앞에 엎드렸다. 그러자 추기경은 한없이 다정하게 루터를 일으켜 세우며 그의 주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하지만 루터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설명을 듣고 싶어 했다.

추기경은 1343년에 발표된 교황 클레멘스 6세의 교서를 언급하면서, 교서에는 교회가 '공로의 보고(寶庫)'라고 밝혀져 있음에도 루터가 이를 부정한다고 지적하였다.
교서의 내용을 잘 알고 있던 루터는, 거기에 정말 그런 말이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겠노라고 하였다.

카예타누스는 득의양양하게 책장을 넘기다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한 보물을 얻었다'는 대목을 짚었다. 루터가 말하기를, "추기경께서 아까는 그리스도의 공로들이 보물 '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한 보물을 '얻었다'고 되어 있군요. 보물 '이다'와 보물을 '얻었다'는 같은 말이 아닌데, 설마 독일인들이 문법에 무지하다고 여기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루터의 이 말은 무례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않았다. 교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보물을 취득하셨으며, 신실한 자들을 현세의 처벌로부터 풀어주기 위해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그 보물의 처분을 맡기셨다는 내용이 분명히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보물은 동정녀 마리아와 성인들의 공로를 통하여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교황은 보물의 비축물을 하나의 보물창고로 사용하여 희년에 로마를 방문하는 자들 가운데 뉘우치고 고해하는 자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거나 교서의 내용을 그럴 듯하게 해석하는 수밖에 없었다. 루터는 후자의 방법을 택하였지만 그것을 글로 쓰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추기경은 루터에게, "나는 지금이라도 자네를 로마교회에 복귀시켜 놓고 싶은 심정이야. 그러나 자네의 주장을 철회해야만 가능하다네."

계속해서 카예타누스는 교황이 성경의 해석자이며 그 어떤 공의회나 교회 안의 그 무엇보다 위에 있다고 하면서 루터를 타일렀다. 루터가 반박하였다. "추기경께서는 성경을 남용하고 계십니다. 교황 성하가 성경보다 위에 계신다는 것을 저는 반대합니다."

추기경은 루터를 달래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주장을 철회하도록 종용하였다. "레보코(Revoco, 나는 철회합니다). 그대는 이렇게만 말하면 된다네. 얼마나 쉬운 일인가! 단지 6개의 철자(RㆍEㆍVㆍOㆍCㆍO)로 그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단 말일세. 진심으로 그대에게 충고하건대, 만약 그리 아니 하면 그대는 교회의 적이 되고야 말 것이네.”

끝내 루터로부터 철회입장을 받아내지 못한 카예타누스는 화를 버럭 내면서 루터에게 당장 물러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루터가 철회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다. 추기경 앞에서 물러난 루터는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소환에 대비하여 아우크스부르크에 계속 머물면서 교황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써서 벽에 붙였다.

면죄 교리가 공식적으로 선언된 적이 없는 만큼, 구원에 불필요한 문제에 관하여 토론하는 것을 이단으로 정죄할 수 없으며, 자신은 오직 성경에 있는 것만 가르치고 있음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루터는 카예타누스 추기경에게 자신을 체포할 권한이 부여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모든 성문들마다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온지 두 주 만인 1518년 10월 20일 밤중에 우호적인 시민들의 묵인 아래 아우크스부르크 성을 몰래 빠져나와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레보코"
큰 두려움 가운데 아우크스부르크로 발걸음을 옮긴 루터였지만, 정작 그가 대적 앞에 섰을 때에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담대하게 펼치며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훗날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되었다.

제국의회의 청문회장에서 황제 앞에 선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에 당당히 맞섰다. "나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었습니다. 나는 철회할 수도 없거니와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일도, 안전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섰나이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1521년 4월 18일, 보름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뿌려진 용맹스런 믿음의 씨앗이 보름스에서 꽃피어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믿음의 사람들 역시 교회 안팎으로부터 숱한 도전을 받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대적 앞에 무릎 꿇지 않고 꿋꿋이 승리의 길로 나아가려 할 때,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철회하도록 유혹할 것이다. "레보코…"이 속삭임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정수길 선교사
독일 아우쿠스부르크


정수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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