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로 소득, 컴퓨터 교육 등 지역 개발로 신뢰 쌓아

<3> 보르노르 마을, 교회 정착기 김봉춘 목사l승인2018.02.13l3128호 l조회수 : 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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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사회주의 시절에는 대학까지의 모든 교육이 무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에게는 매 월 생활비가 제공되었다. 그런데 개방 이후에 정부에서 대학을 지원하지 못하게 되고 대학은 학교 운영상 등록금을 받게 되어서 학비를 전혀 안 내던 사람들에게는 체감 비용이 굉장히 비싸게 느껴졌다.

사회주의의 붕괴, 이는 구 공산권 국민들에게는 심각한 지각변동의 사건이었다. 나라에서 주던 의식주의 혜택이 중단 되었다. 각종 의료, 복지에 대한 혜택도 멈추었다. 전기, 수도, 교통비 등 모든 생활에 요금을 내야 했다.

큰 공장 설비 시설은 러시아가 퇴각하면서 뜯어가 버렸고 핵심 기술자들도 다 러시아로 돌아가 버렸다. 공장은 멈춰 섰고, 각종 정비소에는 고장 난 기계, 차량, 트랙터로 즐비했으며 생계형 도둑과 강도가 생겨났다. 가축이 도난 당했으며, 밤 중에 차량의 백미러나 바퀴를 빼 가곤 했다. 집안 입구에 전구도 훔쳐가 버렸으며, 뭐든지 내 손을 떠나면 남의 물건이 되는 시절이 되었다.

개방 직후의 몽골을 보면서 통일 직후의 북한을 예견할 수 있었다.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통일 이후에 북한 동포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혼란이 생길 것이다. 보르노르 마을에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학비가 없어서 배회하며 삶의 방향을 못 잡은 젊은이들이 여전히 있었다. 그러다가 이들에게 학비를 지원할 방안으로 '감자은행'이 떠올랐다.

방글라데시에서 그라밍 은행(소액융자은행)을 운영했던 무하마드 유누스씨의 사례가 생각났다. 그래서 고 3자녀를 둔 가정을 모아서 식구가 많으면 1t을, 적으면 500kg을 배분하였다. 단, 가을에 추수하면 갚도록 하였다.

봄에 감자 종자를 나눠주고, 가을에는 종자 혹은 종잣 값만 돌려 받을 계획이었다. 아무런 자금력이 없었던 이들에게 감자 농사는 큰 소득원이 되었다. 물론, 순탄하게 잘 진행된 것 만은 아니었다. 감자를 심고 돌아오다가 혹시나 해서 다시 감자 밭으로 갔더니, 수혜자 중에 방금 심은 감자를 도로 캐어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시내의 철물점에서 철조망을 구입하여 감자밭을 보호하였다. 감자의 싹이 돋아나면서 양이 들어와 한 입에 뜯어 버리면 감자 농사는 도루묵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감자은행에 대해 신뢰도 없었고 기대도 협력도 없었다.

몇 번의 주민을 설득하고 설명 후에야 몇 가정은 일을 도왔다. 선교사가 종잣값의 100%를 지원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첫 해에 13가정을 대상으로 시작하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가을에 수확하여 대학 입학생의 학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한국의 J 교회에서 보내 준 중고 컴퓨터를 학교와 군청에 설치하여 울란바타르 대학교의 컴퓨터 선생님을 토요일마다 데리고 가서, 컴퓨터 강의를 하였다. 몽골의 시골마을에서는 컴퓨터가 새로운 문명의 상징이었다. 그러던 중에 마침 한국의 정보통신부에서 보내는 인터넷 봉사단을 신청하여 선정되었고 4명의 단원이 마을에 들어와 한 달간 살면서 공무원과 교사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쳤다.

사회주의의 '통계'는 엄격하면서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러나 '엑셀'을 배우면서 순식간에 통계작업을 할 수 있었다. 또 강원도에서 농업지도사 2명이 마을에 와서 한 여름을 지내면서 비닐하우스와 감자, 오이, 토마토, 고추, 상추 등 다양한 농작물 재배기술을 전수하였다.

한 번은 한 할머니의 집에 방문하였는데 냇가에서 떠 온 물로 차를 끓여 주었다. 방금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죽은 고양이가 둥둥 떠내려 가는 것을 보았다. 문득, 그 차를 마시면서 '주님, 이 차에 있는 균을 없애 주소서' 기도하는데, 마을에 우물을 파야겠다는 '사인'을 얻었다.

그 날, 당시 홍콩에 선교사로 가 있던 박재필 목사께서 교회 바자회에서 선교기금을 모았는데, '5000불이 필요한가?' 물어보는 전화가 왔다. 들판에 있던 나는 곧바로 '예스'하였고, 송금해 주었다. 마을 중앙에 143m 깊이의 우물을 팠다.

보르노르의 다양한 지역개발사역은 진행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게 되었다. 또 한 쪽에서는 성경공부 모임이 진행되었다. 몽골어가 늘면서 성경공부도 재미있었다. 인원도 늘었다.

숨어 하던 성경공부가, 친구가 된 군수의 도움으로 교회용 건물도 구입하게 되었다. 앉아서 하던 성경공부가, 찬양할 때는 일어서게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의 의도적 진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모임은 예배모임으로, 교회로 틀을 갖춰지게 되었다.

 

김봉춘 목사
총회 파송 몽골선교사
울란바타르 한인교회
몽골연합신학교(UBTC)


김봉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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