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 연중기획 ]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쌍굴다리 현장을 가다

최은숙 기자 ches@pckworld.com
2020년 07월 31일(금) 10:00
#70년 전 그날

"어서 빨리 마을을 떠나세요. 전투가 임박했으니 피난을 가야합니다."

1950년 7월 23일.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 명령이 내려졌다. 600여 명의 주민들은 "남쪽으로 피난시켜주겠다"는 미군을 믿고 피난길에 나섰다.

7월 25일 피난민들은 경부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그날 저녁 하천에서 노숙 한 피난민들은 다음날 26일 오전, 미군의 통제로 국도에서 철로 위로 행로를 변경해 노근리에 도착했다. 미군은 소지품 검사를 시작했고 정찰기 한 대가 피난민들의 머리 위를 몇 바퀴 돌고 사라졌다. 그리고 정오 미군 전투기 2대가 피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 폭격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100여 명이 즉사했습니다. 생존자들은 쌍굴 안으로 피했지요."

당시 12살 춘자 씨는 밥을 짓기 위해 물을 뜨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폭격에 너무 놀라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이미 머리에 총을 맞아 쓰러져 있었어요. 저는 울면서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쌍굴로 도망쳤어요." 쌍굴 주변은 시체로 발디딜틈이 없었다. 11살 해숙 씨는 폭격을 피해 아카시아 나무 밑에 숨어있다가 눈에 유산탄을 맞아 눈알이 빠졌다고 했다. "앞이 안보이니 동생 손을 잡고 굴다리로 들어갔지요" 8살 구학 씨는 새벽에 얼굴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두려움에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 "어머니는 기관총사격에 사망했고 2살짜리 여동생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먹다가 총에 맞아 죽었어요".

살아남은 이들은 굴다리 입구에 시체로 요새를 만들었고 하천은 빨간 핏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7월 26일 정오에 시작된 총격은 7월 29일 새벽에서야 멈췄다. 이 곳에서 400여 명의 피난민들이 영문도 모르게 죽어갔다. 쌍굴 안에는 생존자들의 신음과 울부짖음으로 가득찼다.



#그 후로 70년 그날

충북 영동에서 황간으로 넘어가는 4번 국도 옆에 노근리 쌍굴다리가 있다. 이 다리 앞에는 '이곳은 노근리 사건 현장입니다(This is NOGUENRI Incident Point)'라고 쓰인 안내판이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민간인에게 기관총을 난사해 피살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의 현장이 바로 이 곳이다. 굴다리에는 지금까지도 총탄 흔적(○, △ 표시)이 남아 있어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과거의 현장은 여전히 그날의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저기 철로 위에서 총을 쏘는 거에요. 피난 시켜준다고 따라 나섰다가 이렇게 죽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함께 동행한 노근리평화공원 관계자가 안타까움을 전한다.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생각하며 총탄의 흔적을 만져본다. 눈 앞에서 죽어가는 사랑하는 부모 형제, 어린 자녀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비극의 현장은 불행했던 과거가 아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고통의 기억이다. 그들은 회복되지 않는 상처와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다. "70년 그날 노근리의 가족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전쟁은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잊혀져야만 했던' 노근리 사건은 고 정은용 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장이 주한미군 소청사무소에 "노근리 사건은 국제법적으로 '전쟁범죄' 행위에 해당하며 '미국 정부의 공식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한다"는 소청서를 제출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렸다. 정 회장 또한 이 사건으로 5살 아들과 2살 된 어린 딸을 잃었다. 그는 1994년 4월 유족들의 비극을 노근리 실화 장편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고, 이 소설을 계기로 30여 년 만에 노근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 회장의 아들인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 이사장은 아버지와 함께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이후 노근리사건 희생자유족회)가 창립하고 대변인을 자처해 대통령과 국회는 물론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에 20여 차례 진정서를 제출하며 진상규명 해결에 나섰지만 미국 측의 대답은 한결같이 "사건 현장에 미국은 없었다"는 것.

노근리 진상규명과 사건해결에 정부가 외면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현장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진상규명 노력에 힘을 더했다. NCCK는 이어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와 연대해 미국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등 노근리 피해자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려 문제해결에 나서기도 했다. 마침내 1999년 미국 AP통신이 노근리 사건을 보도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노근리 사건이 알려졌다.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긴다는 지시에 의해 노근리 피난민들을 살상한 전쟁범죄"가 입증된 것이다.

이후 1999년 10월 노근리 사건에 대한 한미공동진상조사와 피해접수가 시작됐고 사건발생 50년 만에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피해자와 한국 국민을 대상으로 유감표명 성명서를 발표했다.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의회에 참여한 국회의원 169명 전원의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인권보호와 생명존중의 문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해마다 노근리평화공원에서는 한국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전쟁을 모르는 전후 세대에게 호국정신과 나라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한 행사를 개최하며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알린다. 이 일에 정구도 이사장은 평생을 바쳤다. 그는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은 미군에 의해 400여 명이 희생된 아픈 과거다"면서 "피해자들은 동맹군이라고 믿었던 미군에게 강도만난 자가 아이었을까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울어주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에 2018년 NCCK는 노근리국제평화재단과 상호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노근리사건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확산과 집단적 외상증후군 치유를 외한 노력 등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하기로 하는 등 관심을 갖고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반미와 친미, 진보와 보수의 시각으로 노근리 사건을 인식하며 비난하는 여론이 적지 않다는 것이 정 이사장의 설명이다. "피해자들이 미정부를 상대로 진상조사까지 이끌어낸 것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정 이사장은 "교회가 먼저 보수와 진보, 친미와 반미의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노근리 사건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보호와 생명존중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쌍굴다리에는 여전히 총탄이 박혀있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도 그 참혹함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지금도 전쟁이 남긴 민간인학살사건들이 진상규명을 기다리고 있다. 한반도 평화와 화해, 치유의 사명을 품은 한국교회가 그들의 손을 더 따뜻하고 소중하게 잡아주어야 할 책임이 크다. 그들은 지금도 전쟁의 상처로 울고 있기 때문이다.


최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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