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38정전을 반대했다

[ 아카이브 ] 본보 아카이브를 통해 본 현장
6.25 한국전쟁에 대한 보도

박만서 기자 mspark@pckworld.com
2021년 06월 09일(수) 17:42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단행했다. 이날은 주일이었고, 교회들은 정상적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시간에 맞춰 주일예배를 드렸다. 영락교회에는 당일 주보가 남아 있다. 1950년 6월 25일로 날짜가 찍힌 주보에는 이날 11시 30분에 예배를 드렸으며, 건축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영락교회 35년사에는 이날 예배 분위기를 "북괴군의 남침 보도를 들은 교인들이어서 불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으나 교우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4천여 명이 모였다. 예정대로 예배를 드렸다. 이날은 건축액 부족분 1천만환을 헌금하기로 한 일이었다. 헌금한 결과 목표액을 훨씬 넘는 1200만환이 헌금되었다"고 전해 교인들이 다소 불안해 하기는 했지만 정상적으로 예배가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1946년에 한국기독공보(당시 기독교공보)가 창간됐기에 당연히 1950년에 발생한 6.25에 대한 기록이 지면에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부산 피난지에서도 발행된 본보는 당시의 신문이 소실돼 남아 있지 않아 당시 상황을 읽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본보가 소장하고 있는 축쇄판과 지난해에 제작을 마무리한 디지털 아카이브에는 1949년 10월 18일자 신문부터 1952년 1월 7일자 신문(126~147호)이 남아 있지 않다. 148호(1952년 1월 14일자)가 피난지인 부산에서 발행된 것으로 주소(부산시 광복동 1가 31)가 남아 있어 이전에 발행된 신문이 있을 것이로 기대를 해 본다.

디지털 아카리브 제작을 마무리한 한국기독공보의 1950년 6월부터 1953년 8월(휴전협정일 1953년 7월 27일 이후 한달간 관련 기사까지 검색)까지의 기사를 관련 검색어로 검색한 결과 '전쟁' 117건, '공산당' 65건, '괴뢰' 21건, '김일성' 8건(중복 포함) 등의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6.25와 관련해 남아 있는 첫 기사는 1952년 1월 14일자 1면에 연재중인 '공산주의 비판'이다. 두 번째인 것으로 봐서 소실된 호부터 연재가 시작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말스의 환경과 그 사상기원 제1장'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을 통해 북한 공산당의 부당성을 지적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진다. 1952년 7월 28일자에 22회가 게재된 것에 이어 8월 11일자를 끝으로 연재를 마무리 하면서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무산대중을 보기 좋게 속이고 민주단결은 보기 좋게 우월의 세계를 꾸미며 나간다. 학자의 할 일은 무산계급적 또는 자본계급적 진리에 공헌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 그 자신을 위하야 노작하는 것이다. … 이제는 세계노동자계급은 맑스에 뿌리박은 가치부정의 세계관을 버리고 가치긍정의 신세계관을 대성지 않으면 안된다"(1952년 8월 11일 1면)

전쟁에 대한 한국기독공보 입장은 사설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전쟁 발생 당시의 신문 소실로 전쟁의 시작과 한창 진행될 당시의 상황에 대한 입장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전쟁 발발 2년이 되는 1952년 6월 23일자 사설에서 6.25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역적 김일성도당이 38선을 넘어 남침한날이오. 적색제국주의 소련이 세계침략의 전초전을 시작한 날이다. 평화를 수호하는 UN의 일연인 대한민국은 국방이란 자체치안 유지 정도이었을 뿐 무방비상태로 평화를 구가하였던 터이오. 우리가 38선의 위험을 혹시 말하고 무장을 제언하면 UN은 도리어 우리를 비방하는 터이었으니 우리 쪽 방비가 전연공허하다는 것을 알고있는 국제강도단 콤민포름은 여기서 침략의 기회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 우리의 심정으론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오직 우리는 저정죄받은 침략자가 하루빨리 계멸되고 세계의 화근인 크레무린이 최후궤멸되는 날이 속히오기를 고대하는 바이다."(1952년 6월 23일 1면)

이같이 6.25의 원인과 이후의 기대까지 제시한 한국기독공보는 사설을 통해 처음부터 다시 분단의 길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사설에서 "한국전란이 단기에 종식되지는 못할 것이오"라며 기독교인들을 향해 만약에 있을 제3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사상적 무장을 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면서 한국기독공보는 시종일관 38선을 기준한 정전협정을 반대했다. 1952년 1월 21일 '38선 정전에 반대'라는 사설을 통해 "한국교회는 38정전을 반대한다"고 전제하고, 한국교회가 통일 없는 정전을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피난민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인데 이들은 공산정치 하에 살기를 단념한 것이다. 둘째는 정전에 따르는 포로교환에 반대한다. 현재 포로 중에는 강제징병 된 교인이 많다. 셋째로 정전이 성립된다 할지라도 전비를 강화하여 재침략할 것이다. 두만강 압록강을 교량 하나로 연결하는 북한은 소·중의 영토나 다름없다. 넷째로 이 민족이 자멸할 것이다. 임진강 피안에 적의 포대를 두고 환도한다 할지라도 재건할 수 없다. 경제 없는 정치에 무슨 소망이 있으리오, 사상적 경제적 혼란에서 구할 길이 없을 것이다."(1952년 1월 21일 1면)

이후에도 한국기독공보는 사설을 통해 정전 협정 반대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낸다. 1953년 4월 20일자 사설 '유전재론과 우리의 태도', 1953년 6월 15일 사설 '3천만 결사의거의 추', 1953년 7월 20일 사설 '휴전과 한국교회' 등을 잇따라 게재했으며,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발행된 1953년 8월 3일자 사설 '휴전후의 전망'에서 "6.25적란은 소련이 전쟁하고 싶은 때와 하고 싶은 장소에서 하고 싶은 방법으로 침략하였고. 또한 휴전하고 싶은 때에 하고 싶은 조건으로 마치었으니. 또 소련이 전쟁하고 싶을 때에 계속할 것이다"라고 휴전에 대한 아쉬움과 울분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 "적색제국의 붕괴는 3차대전 전이냐? 3차대전 후이냐? 소련의 망운은 스타린 사망과 동시에 벌써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번 동란에서 사람은 다 죄악의 자식이오 사람의 주의는 다 죄악임을 발견하였다.공산주의의 잔악한 죄악은 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자본주의 자유주의의 부폐도 망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자조섞인 규탄을 이어갔다.



전쟁기간 동안 한국기독공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기사는 '위문'에 대한 내용이다. 성탄절을 비롯해 명절 때는 물론 교인들이 힘을 모아 병원에 입원 중인 부상 군인들을 찾아 위문하고 위문품을 전달했다. 전쟁 기간에 발행된 신문 아카이브에서 '위문'이라는 단어로 검색한 결과 총103건의 기사가 검색됐다.

위문에 참여한 연령층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다. 1952년 4월 7일자에 보도된 '유년 주일학생 위문에 기뻐하는 국군아저씨'에서 강원도 춘천 기독교 유년주일학교 직원 및 학생 33명이 중부전선을 찾아 위문 연주를 한 내용을 전하면서 일선 장병들이 계속해서 위문을 와 줄 것을 요청하고 있음을 전했다. 1952년 7월 14일자에서는 광주 제직회원이 육군병원을 위문 방문한 기사, 1952년 7월 14일자에서는 광주광복교회 소년면려회에서 일선장병에게 위문과 손수건을 전한 내용, 1952년 8월 11일자에는 덕성고녀 YWCA 학생위문단이 해병대 용사를 찾아 위문, 1952년 10월 6일자에서는 중앙교회 여전도회가 봉투 붙이기로 기금을 마련해 상이병을 위로 등등 다양한 내용의 위문 활동이 기사화 됐다.

특히 1953년 2월 16자는 대한신학교가 일선위문전도대를 파견하고 전쟁이 진행 중인 현장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부산여러교회에서 주는 위문품(성경 찬송 신앙생활 기독공보 요한복음 산상 설교 교리문답 위문편지)을 가지고 제2사단 철원지구를 방문하였다. 지난 겨울 격전지로 유명하였던 백마고지를 우리들은 직접 밟아보았으며 호안에서 국군과 함께 자며 적의 포탄이 십메몰앞에 작렬하는 광경도 체험하였다. 산상고지라 물이없어 언제 세수를 하였던가 얼굴은 모두 검어지고 간절한 맘이 솟아나 일일히 악수를 청할 때 내미는 손길은 장작을 잡는듯한 거칠고 차거운 감각이였다. 그간 여러 차례의 위문단이 다녀갔다는 말만은 들었으나 이렇듯 최전선에까지 직접 호안에까지 또 직접 위문품을 받기는 수년 만에 처음이라고 하며, 그들은 감사의 눈물조차 흘리는 것을 보았다. 적은 바로 1키로 전방에 있는 것이다. 적은 이쪽을 향하여 미리 조준을 하고 있다가 교통호만 한 발거름 나서면 총탄이 별안간에 날아온다고 한다."

또 필자는 이 기사에서 "조반은 20리 먼 곳에서 운반하여옴으로 대개 오후에 먹으며 언밥을 뜯어 먹는 형편이었다. 날씨가 추운 겨울이건만 백마고지는 아직도 치우지 못한 적의 시체가 많이 보였으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날이 풀리고 봄이 된다면 이 냄새 때문에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저들이 후방에 당부하는 말은 위문편지가 있기를 바라고 가정의 생활을 많이 염려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일선에 나왔는데 그의 아버지가 또 징용돼 나왔으니 남은 식구들은 어떻게 생활하는가 이것을 염려하였다. 그리고 또 후방의 부패상이 들려오니 좀 전시기분으로 살아달라는 당부였다. 우리는 한국의 젊은이로 일선에 당연히 나와야 하나 후방에서 특히 학생들이 검소한 생활을 하지 않고 빼고 다닌다는 소식을 불쾌히 생각하였다. 또 어떤이는 정부에서는 일일 6홉의 쌀을 내어주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상당히 감소되어 온다고 말하였다."며 전투 현장의 이야기와 함께 실상을 고발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피난 신도 위문기'(필자 이순경 목사)를 1952년 1월 21일자부터 4회에 걸쳐 한국기독공보는 연재해 북한에서 피난 온 교인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연재 첫 원고에서 필자는 "지난 12월 4일 시내 영락교회에서 이북신도대표회 임시총회가 모였다. 여러 가지 중요한 사업을 결의하는 중에 특별히 이남 각지에 산재한 피난신도들을 위문할 것과 상호연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각에 지회 조직할 것을 가결하고 대표 4인을 선정 파견하니 한경직 이인직 이○수 이순경 이었다"고 기록했다.



한편 '신앙실화 회고'(필자 김재필)로 1953년 2월 2일부터 시작된 연재는 휴먼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인민군 소속이던 필자 김재필이 낙오된 미군 장교를 만나 그를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과정부터 시작하는 신앙실화는 3회부터 '사선방황미병구출실화(死線彷徨美兵救出實話) 신앙실화'란 제목으로 이어지며, 1953년 6월 1일자에 14회가 게재되고 중단된 후 1953년 12월 14일자 2면에 '미군비행사를 구출한 김재필군의 최근소식'이 기사화 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한국기독공보는 6.25전쟁기간 동안에 기독 군인 장교들의 활약상 등을 다양하게 소개하기도 했다.



박만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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