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가 신정론을 거부한 이유

칸트가 신정론을 거부한 이유

[ 인문학산책 ] 15

박원빈 목사
2021년 05월 04일(화) 10:00
신학과 서양 형이상학의 핵심인 신 개념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성경말씀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이런 세계에 가장 큰 위험은 바로 '악의 문제'이다. 신의 질서와 조화 가운데 창조된 최선의 세계에서 왜 악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가 세운 중세적 세계관은 근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시작된 계몽주의 사상의 거센 도전을 받게 된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의 정점에 선 인물 중의 하나이다. 칸트는 그의 나이 30대 초반에 예고 없이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을 보며 악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1755년 11월 1일 오전 9시 20분에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거의 모든 기간산업을 잃었고 지진 이후에 해일과 화재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지진은 한창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포르트갈의 열정적인 식민지 개척에 찬물을 끼어 얹었다.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악의 문제를 신정론과 관련하여 활발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칸트도 토론에 참가한 당대의 논객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유럽인들은 리스본 대참사를 신의 형벌로 이해하려는 흐름이 있었는데 계몽주의 이성의 소유자인 칸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신학에서 악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은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신의 정당화"(justification of God)라는 뜻이다. 이 말은 라이프니츠가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하나님을 뜻하는 희랍어 '데오스'와 정의를 뜻하는 '디케'의 합성어이다. 그 후로 이 신조어는 세상에 현존하는 악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을 변호하는 자연신학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칸트는 신정론을 통해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주장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비도덕적이라고 말한다. 당시 신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재해는 신의 형벌이 될 수 없다. 여기에는 아무런 논리적인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에 닥친 불행이 마치 신의 형벌인 것처럼 논하는데 이는 인간이 저지르는 도덕적인 악과 자연재해 등으로 당하는 인간의 고통(칸트는 이를 자연악이라 한다)을 혼동했기 때문이다. 1756년 쾨니스베르그의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리스본의 지진을 순전히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신정론을 거부하다

칸트가 신정론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재의 악과 고통의 문제를 미래에 대한 상급과 암암리에 연결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내가 겪는 고통은 미래의 영원한 나라에서 얻게 될 상급이기에 지금의 고통은 신의 섭리의 빛에서 보면 항상 의미 있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런 신정론의 설명은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약화시킨다. 인간은 도덕적 주체로서 이성에 합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칸트는 '종교론'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따르다가 도덕적 책임을 상실했다고 진단한다. (12회 레비나스의 비판도 참고하라) 칸트는 상황과 개인의 유익에 따라 변화하는 상황윤리가 아닌 보편적 이성에 기초한 도덕률을 세우고 그것을 정언명령이라 한다.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 네가 동시에 원할 수 있는 것 같은 준칙만을 따라서 행동하라" (윤리형이상학정초)


준칙이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기초가 되는 주관적 원리이다. 나의 만족을 위해 타인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더라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자아의 만족을 위해 어떠한 비도덕적 행위도 상관없이 행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칸트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과연 이런 개인의 준칙을 인간 사회를 위한 도덕법칙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칸트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인간으로서 건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내가 따르는 주관적 준칙은 반드시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법칙과 부합해야 한다. 신정론은 지금 여기서 이뤄져야 할 도덕 판단과 책임을 미래로 미루어 버리고 심지어 신의 이름으로 타인의 고통을 정당화하기에 이를 거부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선한 행위는 마땅히 보상을 받고 악한 행위는 바로 벌을 받아야 한다. 이런 결정론적 세상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단지 신의 당근과 채찍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의 한계

이성에 기초한 정언명령이 사회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보편적 도덕법칙과 아무 상관없는 자연악이 주는 고통은 어떻게 해야하나?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칸트도 자연악의 문제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자연악은 인간의 책임은 아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류 발전에 기여한다. 자연악에 대항하기 위해 인류는 과학과 지식의 힘을 이용하여 자연악의 문제들을 하나둘씩 극복하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세상은 자연악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얼마든지 더 나아질 수 있는 세상이다. 칸트를 소위 '근대성'(Modernity)의 정점에 올려놓는 이유도 이성을 통해 인류 역사가 개선되고 진보하리라는 확신을 가진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너무 힘든 이 시점에 칸트의 자연악에 대한 설명은 아주 냉정하게 들린다. 마치 지금 당장 코로나로 수십만명이 죽어가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문제는 사라지고 결국 나아질 것이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악의 문제를 바라보는 한계이다.

칸트는 모든 도덕 법칙을 인간 이성에서 이끌어낸다. 흔히 의무론적 윤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이성이 제공하는 마땅히 따라야 할 의무를 준수할 만큼 인간이 항상 합리적이고 도덕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도덕적 당위를 저버리고 욕망을 쫓아 살아간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내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불순종을 '원죄'라고 했다. 세상의 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죄를 좇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박원빈 목사 / 약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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