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에서 발견한 희망의 복음

[ 현장칼럼 ]

김기용 목사
2023년 12월 29일(금) 07:37
크리스마스 리스는 1839년 독일 함부르크의 '라우에 하우스'(Rauhes Haus, 아동 시설)에 처음 등장했다. 이때 전나무 잎으로 엮은 리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고, 매일 밝혀지는 촛불은 서서히 물러가는 어둠만큼 밝아오는 '희망'을 의미한다.

이 불빛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난한 사람들의 인생에 비춘 생명의 빛이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은 대림절기로부터 구주성탄을 기념하는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새 소망을 갖게 한다.

예수님의 보혈과 성탄 시즌을 대표하는 붉은색의 이미지와 실사를 떠올리고 보노라면 올해에는 특히 '빈대'가 생각난다. 빈대의 배를 터뜨리면 인혈(人血)이 그 안에서 튀기 때문이다.

올해 하반기 우리 시설에 갑자기 빈대가 출몰하여 한창 극성을 부렸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고 하듯이 빈대는 열에 약해서, 가장 빨리 확실하게 박멸하려면 불로 태워야 한다. 어느 시설은 실제로 벽과 옷장 등에 빼곡한 빈대의 알을 불로 집중 공격하다가 작은 불이 나거나 곳곳에 그을린 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우리는 이 방법을 쓰지 않았다. 전문 업체의 방역, 침구류 세척 등 안전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방식의 모든 노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삼일이 멀다 하고 이용자들의 아우성은 계속됐다. 어떤 분은 빈대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그 근원적 해결책을 나에게 직접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리나라에 빈대가 40년 만에 강력한 내성을 가지고 재등장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됐다.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빈대 출몰의 원인이 노숙인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빈대가 옮겨붙어 들어왔다고 하니,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빈대는 생길 수 있고 삶의 모양 및 입장과 무관하다는 걸 확인하게 됐다.

도리어 빈대에서 희망이 발견된다. 예수님의 보혈은 당신의 자발적 희생에 의한 구원의 증표이고 빈대의 피는 누군가 입은 피해의 흔적이지만, 빈대로부터 희생(?) 당한 덕분에 노숙인 시설이 지자체로부터 행정적 관심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가 관심을 갖고 노숙인과 함께 한 것이다.

많은 경우 타인의 눈에 노숙인은 희망이 없고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많은 교회와 신앙인이 예수님 긍휼의 심정으로 희생하여 노숙인을 돌보고 함께 한다.

프란츠 카프카(F. Kafka)의 소설 '변신'에는 한 평범한 사람이 전혀 다른 종으로 그 외형이 바뀌자 격리되고, 완전히 경제 능력을 상실하고서는 도리어 가족들로부터 싸늘하게 버림받는다. 이렇듯 제 가족도 돌보기 힘든 세상 속에서 교회가 표하는 포용과 동행이 구주성탄의 환희처럼 고결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여 예수님의 보혈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빈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모든 인류가 구주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 사함 받아 구원을 얻듯이, 이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과 구분에 따른 선입견으로 노숙인을 차별할 수 없다.

성육신 및 십자가 상 죽음이 불필요한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 이를 택하셨다.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과 평강으로 이끄신 섬김과 포용의 능력이다. 인류는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부활의 희망을 얻게 됐다.

노숙인은 없어져야 할 빈대 같은 존재로 차별받고 있다. 빈대 같은 세상의 피해자이다. 나에게는 불필요한 행위가 어떤 이에게는 희망과 큰 은혜와 축복으로 전해진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예수님 희생의 증거와 그 구원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인류를 품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 희망을 품으며 교회는 지역사회와 더불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돌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 알의 밀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요 12:24-26).



김기용 목사 / 영등포산업선교회 햇살보금자리 시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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