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은의 영화보기 ] 나의 올드 오크
최 은
2024년 02월 09일(금)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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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북부의 폐광 마을에 시리아 난민들을 태운 버스가 한 대 도착한다. 가뜩이나 집값이 떨어지고 마을이 몰락해 가는데 종교가 다르고 말도 잘 안 통하는 난민까지 수용하게 되어 마을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나 있다. T.J. 발렌타인(데이브 터너)이 운영하는 주점 '올드 오크'의 단골손님이자 오랜 친구인 찰리와 이웃들은 매일 이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혐오발언을 해댄다. 어느 날 이 곳에 시리아 소녀 야라(에블리 마리)가 망가진 카메라를 들고 찾아와 T.J.에게 도움을 청한다. 켄 로치의 스물여섯 번째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카메라(예술)를 매개로 한 우정과 연대, 화해와 희망을 키워드로 삼았다. 88세의 노장은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할 의사를 밝혔다.
켄 로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 수상한 것으로 유명한데, '나의 올드 오크'는 그의 전작들 중 공간이 주제인 '지미스 홀'(2014)과 많이 닮았다. 아일랜드 내전이 종료된 지 10년쯤 후 마을을 떠났던 지미가 돌아와 이전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던 마을 회관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이야기다. 서로 미워하고 경계하느라 힘든 사람들에게 쉼이 되는 평화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오늘날까지 켄 로치 작품에서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T.J.의 낡은 주점 올드 오크도 그런 공간이었다. 1984년 탄광이 폐쇄된 이래 교회와 마을 회관은 문을 닫은 지 오래인 데다가 가난과 질병으로 냉소와 절망이 가득한 이 마을에서 올드 오크는 유일한 공적 공간의 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다.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과 소원해지고 비뚤어진 간판을 수리하거나 보험료를 낼만한 재정적 여유도 없었지만, 40년째 주점을 닫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죽음을 결심했을 만큼 힘든 순간을 이겨내고 지금은 구호단체를 도우며 이방인들에게까지 친절을 베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켄 로치의 영화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한' T.J.에게 위로를 건네며, 그것으로 충분한가 넌지시 묻는다.
올드 오크 메인 홀 안쪽에는 연회실이 하나 더 있었다. '지미스 홀'처럼 한때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약혼식을 하고 잔치를 하던 공간이었는데, 운영이 어려워 그 곳은 20년째 잠겨 있었다. 이 연회실을 다시 여는 것은 T.J.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시작은 야라에게 삼촌의 낡은 카메라를 찾아 보여주려는 단순한 이유였다. 어떤 일은 그렇게 쉽게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생긴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은 그가 이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려준다. 우리냐, 저들이냐, 40년 동안 술을 팔아준 오랜 단골들이냐, 새 친구들이냐 선택하라고 찰리와 단골들이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T.J.가 이 거짓 질문에 말려들지 않은 것은 지혜롭고 고마운 일이다. 야라와 시리아 공동체를 위해 방을 여는 것이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을 버리는 일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폭력을 부르는 부당한 요구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것도. 나냐 너냐가 아니라, 실상 그것은 절망이냐 희망이냐의 선택이었다. 난민들 뿐 아니라 은둔중인 청소년과 밥을 굶으며 차라리 난민들을 부러워하는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T.J.의 홀'은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각자의 고향에서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더 단단해진다"고 외쳤던 연대의 순간들을 공통의 기억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T.J.에게 20년 만에 올드 오크의 연회실을 열어야 할 이유가 나눔이고 '희망'이었다면, 그곳은 오늘날 교회가 꿈꾸는 여러 이름 중 하나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공간 중에는 진짜 '교회'가 있다. 천년을 살아남은 대성당의 예배당에 앉아 야라는 울면서 T.J.에게 말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어서 다시 희망을 품게 돼요."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란 천 년 후를 보장할 수 없이 파괴되어버린 고향땅의 절망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어서 슬프고 애잔하다. 대성당의 웅장함도 올드 오크의 환대도 모두 '희망'이지만 야라에게 어떤 쪽이 더 사려깊고 다정한 것인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닫힌 광산으로 인해 고립된 마을과 시리아인들이 수년간 갇혀 있던 난민 캠프와 집밖으로 나오지 않고 스스로 갇히기로 한 청소년들과 오래 전 문을 닫은 교회와 마을 회관처럼, 닫힘과 열림의 이미지를 따라 '나의 올드 오크'를 다시 보면,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위해 어디를 어떻게 열고 닫아야 할지 생각할 수 있다. 다만 교회라 해도 좋을 그 상징적인 공간이 올드 오크의 연회실로 다시 '닫히지' 않고 온 마을이 환대의 공간으로 활짝 열리는 마지막까지, 우리는 시선을 놓지 않아야 한다. 야라 아버지의 추모객들이 야라네 거실을 넘어 집 앞 거리를 가득 채운 것처럼, '우리'의 공간 또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교회에 제한되지 않는 희망이야말로 모두에게 진짜일 것이다.
최 은 영화평론가/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켄 로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 수상한 것으로 유명한데, '나의 올드 오크'는 그의 전작들 중 공간이 주제인 '지미스 홀'(2014)과 많이 닮았다. 아일랜드 내전이 종료된 지 10년쯤 후 마을을 떠났던 지미가 돌아와 이전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던 마을 회관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이야기다. 서로 미워하고 경계하느라 힘든 사람들에게 쉼이 되는 평화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오늘날까지 켄 로치 작품에서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T.J.의 낡은 주점 올드 오크도 그런 공간이었다. 1984년 탄광이 폐쇄된 이래 교회와 마을 회관은 문을 닫은 지 오래인 데다가 가난과 질병으로 냉소와 절망이 가득한 이 마을에서 올드 오크는 유일한 공적 공간의 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다.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과 소원해지고 비뚤어진 간판을 수리하거나 보험료를 낼만한 재정적 여유도 없었지만, 40년째 주점을 닫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죽음을 결심했을 만큼 힘든 순간을 이겨내고 지금은 구호단체를 도우며 이방인들에게까지 친절을 베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켄 로치의 영화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한' T.J.에게 위로를 건네며, 그것으로 충분한가 넌지시 묻는다.
올드 오크 메인 홀 안쪽에는 연회실이 하나 더 있었다. '지미스 홀'처럼 한때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약혼식을 하고 잔치를 하던 공간이었는데, 운영이 어려워 그 곳은 20년째 잠겨 있었다. 이 연회실을 다시 여는 것은 T.J.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시작은 야라에게 삼촌의 낡은 카메라를 찾아 보여주려는 단순한 이유였다. 어떤 일은 그렇게 쉽게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생긴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은 그가 이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려준다. 우리냐, 저들이냐, 40년 동안 술을 팔아준 오랜 단골들이냐, 새 친구들이냐 선택하라고 찰리와 단골들이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T.J.가 이 거짓 질문에 말려들지 않은 것은 지혜롭고 고마운 일이다. 야라와 시리아 공동체를 위해 방을 여는 것이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을 버리는 일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 폭력을 부르는 부당한 요구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것도. 나냐 너냐가 아니라, 실상 그것은 절망이냐 희망이냐의 선택이었다. 난민들 뿐 아니라 은둔중인 청소년과 밥을 굶으며 차라리 난민들을 부러워하는 마을의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T.J.의 홀'은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각자의 고향에서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더 단단해진다"고 외쳤던 연대의 순간들을 공통의 기억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T.J.에게 20년 만에 올드 오크의 연회실을 열어야 할 이유가 나눔이고 '희망'이었다면, 그곳은 오늘날 교회가 꿈꾸는 여러 이름 중 하나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공간 중에는 진짜 '교회'가 있다. 천년을 살아남은 대성당의 예배당에 앉아 야라는 울면서 T.J.에게 말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어서 다시 희망을 품게 돼요."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란 천 년 후를 보장할 수 없이 파괴되어버린 고향땅의 절망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어서 슬프고 애잔하다. 대성당의 웅장함도 올드 오크의 환대도 모두 '희망'이지만 야라에게 어떤 쪽이 더 사려깊고 다정한 것인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닫힌 광산으로 인해 고립된 마을과 시리아인들이 수년간 갇혀 있던 난민 캠프와 집밖으로 나오지 않고 스스로 갇히기로 한 청소년들과 오래 전 문을 닫은 교회와 마을 회관처럼, 닫힘과 열림의 이미지를 따라 '나의 올드 오크'를 다시 보면,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위해 어디를 어떻게 열고 닫아야 할지 생각할 수 있다. 다만 교회라 해도 좋을 그 상징적인 공간이 올드 오크의 연회실로 다시 '닫히지' 않고 온 마을이 환대의 공간으로 활짝 열리는 마지막까지, 우리는 시선을 놓지 않아야 한다. 야라 아버지의 추모객들이 야라네 거실을 넘어 집 앞 거리를 가득 채운 것처럼, '우리'의 공간 또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교회에 제한되지 않는 희망이야말로 모두에게 진짜일 것이다.
최 은 영화평론가/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