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적(宿敵) 일본

[ 독자투고 ]

임춘환 목사
2019년 08월 21일(수) 08:14
숙적(宿敵) 일본



요즘 한·일간의 경제·무역 전쟁이 연일 뉴스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일본 아베 정권의 치밀한 계산으로, 그리고 준비된 일정에 맞춘 무역보복을 바라보며 정말 일본은 선린(善隣)을 포기한 영원한 적, 원수(怨讐) 또는 숙적(宿敵)이 되려고 작정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엄연히 삼권(三權)이 분립된 자주국가의 사법적 판단을 문제 삼아 자국민을 선동하고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를 위협하는 것이나, 우리의 반발을 예상하고 기다리며 더 큰 노림수를 감추고 있는 그 간교함을 보면 화가 치민다.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경제를 위협하며 국제 협업의 취약한 고리를 무기 삼아 겁박하고 있는 일본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16세기말, 임진왜란을 비롯한 역사적 사안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며 일제의 서슬퍼런 총칼 앞에서도 3·1 독립만세운동을 외쳤던,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의 그 함성을 기억하며 이제 우리도 다시 한 번 '경제독립 만세'를 준비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꽤나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한 해 무려 700만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에 가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때 모처럼 일본에 여행하게 되면 전자제품 중 카세트 라디오나 소니 워크맨, 코끼리(조지루시)밥솥, 카메라를 필수품처럼 사왔고, 수많은 보따리 장사들이 일본을 오가며 많은 이득을 남겼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일본제품이면 모두들 감탄하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 당시는 한국전쟁의 상흔에서 겨우 벗어나 20여 년이 지났지만 먹고 살기에도 벅찼으며, 가난을 벗어나고자 국가적으로 몸부림치던 때인지라 양국 간의 경제 규모나 기술적인 격차도 워낙 커서 한국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던 시대였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일본이 만든 기계를 사와서 제품을 만들어야 했기에, 또한 그 기계를 돌리기 위한 원료와 기초소재도 대부분 일본제품을 사용해야 했기에, 우리나라가 근대화로 나가면 나갈수록 경제와 산업의 플랫폼(Platform)이 급속도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일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 수출품의 대부분이 일본의 핵심 기자재와 부품들로 구성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일본의 금융자본이 한국에 와서 채권·주식·부동산 시장과 제2금융권의 소매시장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는가? 거기에다 뿌리 깊은 친일파 후손들과 친일언론, 정치인들이 얽히고설켜 그 기득권과 막강한 힘으로 사회 요소요소에서 은밀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은 외형적으로는 독립국가임에 분명하지만 실제론 산업구조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전히 일본에 종속된 나라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 참담한 현실 앞에 경제·무역의 보복 앞에 어떻게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보란듯이 일본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맘은 굴뚝 같지만 힘이 없어 결국은 굴복할 수밖에 없다면 그처럼 비참한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한 일본인 기자가 그동안 한·일 관계가 악화할 때마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여러 번의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조명하며 이번 불매운동도 잠시 반짝이다 흐지부지 실패할 것이라고 조롱하듯 지적했다. 냉정히 말해 우리가 더 민망한 노릇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일시적인 감정으로 거대한 일본을 이기기에는 도무지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일본으로부터 능욕당하지 않을 방법은 없단 말인가!

문득 열왕기하 18장에 기록된 유다 왕 히스기야가 앗수르 산헤립왕으로부터 받았던 겁박이 떠올랐다. 히스기야왕은 대국 앗수르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싹싹 모았고, 심지어 여호와의 성전 문짝과 왕궁의 기둥들에 입혔던 금까지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쳤지만 여전히 산헤립의 종 랍사게를 통하여 왕부터 모든 예루살렘 거민에 이르기까지 능욕을 당했던 모습이다. 바로 그 모습이 작금의 한·일 간의 경제·무역전쟁과 오버랩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동안 독도를 자기 땅이라 우기며 여전히 도발하는 일본, 도쿄 도심 한 복판에서 혐한(嫌韓)을 외치며 한국에 대한 가학과 증오를 부추기는 나라, 정치적 위기 때마다 그저 만만하게 보이는 한국을 그 제물로 삼고 있는 나라, 그럼에도 강남의 '소나타'(대중화된 자가용)가 이제는 토요다 '렉서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하니, 도대체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성과 자화상을 어떻게 말하고 설명해야 할까? 혹자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국적을 따지느냐고, 그저 가격 좋고 품질만 좋으면 됐지"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일본 제품의 가격과 품질이 우리나라의 운명과 자존심 보다 더 중하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영원한 숙적 일본의 능멸과 조롱 속에서 자자손손 누리며(?) 살게 하자는 말인가?

유다 왕 히스기야가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주의 전에 들어가 부르짖었던 것처럼, 이 국가적 위기 앞에 교회는 과연 어떤 선지자 역할을 감당해야 할까? 교회는 그동안 맘몬니즘에 빠져 조국의 정신세계와 미래를 제 때에 바르게 준비하지 못했고 또한 부지불식간에 일본에 종속되기까지 우리 민족을 일깨우지 못했던 무지와 무능에 대해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 교계 지도자들은 3·1독립만세운동을 목숨 걸고 앞장서 나갔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100년이 지난 지금, 경제주권의 회복과 독립을 위해 물산장려와 경제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 숙적 일본을 이웃으로 두고 있다는 냉정한 현실 앞에 교회가 지금이라도 사태를 직시하며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임춘환 목사/동산숲교회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