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론이 어떻게 중세 스콜라신학에 위협이 됐는가

[ 논쟁을통해본교회사이야기 ] <10>보편논쟁

박경수 교수
2020년 01월 23일(목) 17:37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세 스콜라주의 체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중세시대를 이끌었던 스콜라주의는 신앙과 진리의 모든 문제를 이성으로 규명할 수 있다는 확신에 근거한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사조이다.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추구하면서, '독백'과 '강론'이라는 저술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이성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이후 수많은 중세 학자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이성으로써 꼼꼼하게 추론하고 입증하고자 했고, 마침내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걸작 '신학대전'을 통해 신앙과 이성, 은총과 자연의 종합을 이루었다.



실재론-유명론 논쟁

중세 스콜라주의는 실재론(實在論)을 근거로 강고한 사상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실재론은 보편적인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또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사물들보다 선행한다'고 믿었다. 만일 개별 사물들보다 앞선 보편적인 것이 없다면, 우주에는 '오만가지 잡다한 것들의 와글거리는 혼란'만 있게 될 뿐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존재의 실재를 인정해야만 이성적이고 질서정연한 우주관을 정립할 수 있다. 중세 대표적인 실재론자로는 안셀무스(1033~1109년), 상포의 기욤(1070~1121년) 등이 있다. 이들 실재론자들에 의하면, 보편적인 실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삼위일체론, 교회론, 원죄론을 제대로 확립할 수가 없다. 보편적 인간, 보편적 원죄를 부인하면 개별적 인간, 각자의 죄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기 동안에도 유명론(唯名論)이라는 상반된 철학 사조가 존재했다. 보편적인 것은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유명론이다. 안셀무스나 기욤과 동시대인이었던 로스켈리누스(약 1050~1125년)는 보편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이며, 언제나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인 개념보다 선행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유명론의 입장은 큰 힘을 얻지 못하다가 중세 말기인 14세기 잉글랜드의 윌리엄 오컴(약 1287~1347년)에 의해 다시 주창되면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유명론의 입장에 따르면, 삼위일체 교리에서도 삼위의 개별적인 실체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삼위 모두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신성은 말 그대로 유명무실(有名無實)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아담을 보편적 인간으로 보는 것도, 아담의 죄를 모든 인간의 보편적 죄로 간주하는 것도, 심지어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으로 간주하면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한다고 주장하는 보편속죄론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한 급진적 유명론은 중세 교회 교리의 근간을 흔들었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따라서 로스켈리누스나 오컴은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보편의 존재를 믿는 실재론과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믿는 유명론의 양극단 사이에서 조화를 꾀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를 개념론(槪念論) 혹은 중도적 실재론이라고 하는데,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년)가 제안한 입장이다. 아벨라르는 보편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유명론의 입장), 인간의 정신 속에 개념으로 존재한다(실재론의 입장)고 주장했다. 아벨라르는 '개별적인 사물 안에 보편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다. 13세기의 스콜라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약 1200~1280년)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도 얼마간 중도적 실재론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보편과 개체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소위 보편논쟁은 중세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철학과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유명론과 루터의 사상

로마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루터를, 개신교 신학계에서 흔히 그렇게 하듯,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에의 의존성 안에서만 고찰해서는 안 되며, 오컴과 빌과의 적극적 관련성 안에서도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은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의 재발견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유명론자인 오컴과 가브리엘 빌(약 1420~1495년)의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정당한 지적이다. 루터는 오컴을 가리켜 '의심의 여지없이 스콜라 학자들의 지도자이자 지적 역량이 가장 뛰어났던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며, 자신의 '친애하는 스승'이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오컴주의자로 자처하기까지 했다.

신학자로서 오컴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사상에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오컴은 종교적 진리는 이성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콜라주의는 이성으로 모든 종교적 진리를 논증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오컴은 하나님의 계시는 순수 이성으로 증명될 수 없고 오히려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이후 루터의 '오직 믿음'의 원리로 발전되었다. 둘째, 오컴은 흔히 마지막 스콜라주의자라 불리는 둔스 스코투스(1266~1308년)를 따라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상을 출발시켰다. 중세 스콜라주의가 하나님의 지성과 이성을 강조하는 주지주의(主知主義)의 경향성을 보였다면, 스코투스와 오컴은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하는 주의주의(主意主義)의 입장을 택했다. 루터는 오컴을 영웅이라 부르며 환영했는데, 그것은 그가 사변적인 스콜라철학을 폐기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와 능력을 확고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셋째, 오컴은 교회론에서 교황 개인보다 교회회의 즉 공의회의 권위가 우선한다는 공의회주의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오컴은 교회를 불가시적인 보편 실재가 아니라 개별 신자들의 회합 즉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교회의 제반 사항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전체 대표의 모임인 공의회가 최우선적 권위를 지닌다고 보았다. 이것은 루터가 독재적인 로마교황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이와 같이 중세 후기에 등장한 유명론은 중세 스콜라주의의 가장 근간이 되는 교리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중세체제에 균열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원리들을 제시함으로써 새 시대를 여는 혁명의 씨앗이 됐다.

박경수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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