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 그는 왜 영국 땅에 잠들었나

[ 창간75주년기획 ] '역사에게 내일의 길을 묻다' 4. 은퇴 후 부인 고향인 영국서 왕성하게 사역한 게일

김보현 목사
2021년 04월 13일(화) 08:10
바스 시내에서 북쪽 언덕 위에 위치한 란즈다운 묘지. 이곳에 우리에게 '하나님'이란 이름을 선물해 준 선교사 게일이 잠들어 있다.
성경 모양의 묘비에는 한국에서의 사역과 가족 사항이 적혀있다.


제임스 S. 게일(James Scarth Gale1863~1937). 1888년 내한해 40년간 사역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인 그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한국교회 성도라며 누구나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할 수 있다. 성경 다음의 애독서라 알려진 '천로역정'(Pilgrim prograss)이 그의 손에 번역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을 '천주'나 상제가 아닌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주장과 노력 덕분이었다. 우리 민족 문화적 우수성과 고유함을 일찍이 간파하고 온 몸으로 받아들였던 그의 개방성과 탁월함이 있었기에 우리 심성과 영성에 가장 잘 맞는 모습의 기독교로 자리하도록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런 그가 은퇴 후 고국인 캐나다로 귀국해 조용히 여생을 보냈으리라 필자도 막연이 그런 생각을 갖고 지내왔다.

2019년 봄, 함께 동역하고 있는 영국교회 당회원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오래 전부터 함께 한 동역자 더기 목사와는 영국에 있을 때부터 이미 양국 교회의 뿌리 깊은 연관성에 대해 자료를 나누면서 현재 첫 순교자 토마스 목사 이야기를 나누고 고향 고향를 방문하기도 했었다.

# 캐나다 출신 선교사가 왜 영국으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 양화진 외국인묘지를 방문,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언론인으로 우리 민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애국 언론인 토마스 E. 베델에 대해 소개해 주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신학교 재학 때부터 약 5년 가량 사역했던 연동교회를 잠시 들러 초대 게일 목사님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 동역자 귀에는 무엇보다 '스캇'(Scarth)이라는 중간 이름이 가슴에 남았던가 보다.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던 그에게 자신들만의 고유한 이름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분된 목소리로 연락이 왔다. 베델의 생가 주소를 확인했다는 소식과 함께 '게일 목사께서 근처에 계시니 함께 가보자'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바로 브리스톨에서 불과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도시 바스(Bath)에 그가 은퇴 후 정착했고, 그곳 장로교회를 출석했으며, 부인과 함께 매장된 묘소까지 있다는 것이다. 날을 정해 더기 목사 부부와 연동교회 출신 아내와 함께 2019년 부활절을 지낸 어느 이른 아침 바스를 방문했다.

게일 목사가 살았던 제임스스퀘어 35번지는 찰스 디킨스가 살았던 곳으로 명패가 붙어있다. 1930년 2월 7일 디킨스의 생일을 기념해 명패에 기념 리스를 달고 있는 게일 선교사. (외손녀 로즈마리 여사 제공)
찰스디킨스에 이어 게일선교사가 살았던 제임스 스퀘어 35번지의 현재의 모습. 그가 당회원으로 활동했던 홀리 트리니티장로교회에서 800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


기록을 좇아 그가 출석했던 교회인 홀리 트리니티 장로교회를 방문했다. 시내 중심지를 살짝 비켜선 위치이다. 입구에는 '헌팅톤 채플'이라 쓰여 있다. 웨슬리와 함께 감리교운동을 이끌었던 조지 휫필드는 깔뱅주의 노선을 견지해 웨슬리와 갈등을 빚는데 바로 휫필드와 감리교 운동을 지원했던 헌팅돈백작부인이 1765년 건립한 예배당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이 건물은 1922년 장로교단에 이양돼 바스와 브리스톨을 아우르는 노회 산하에 있었고, 1972년 영국연합개혁교회가 출발하며 URC와 한 뿌리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도시에 보기 드문 고딕양식의 이 채플은 현재 '바스 건축박물관'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게일 선교사가 거주했던 주택은 교회에서 불과 800m 남짓 거리로 위치해 있는 '센 제임스스퀘어 35번지'. 바스의 랜드마크로 존 우드의 작품인 '로열 크레센트' 바로 뒤편이다. 18세기 말 건축되었으니 게일 목사가 거주하던 당시 이미 백 년이 넘은 건물이다. 입구에 붙여진 현판에는 영국의 유명한 시인 월터 새비지 랜더와 찰스 디킨스가 거주했다는 곳이라 각각 표기돼 있다. 문학을 사랑한 그에게는 이 또한 남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찍으며 왠지 그 옆에 이제는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게일 선교사가 사셨던 곳'이라는 명패가 붙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사진 좌로부터 게일 목사의 서명이 담긴 트리니티장로교회 당회록. 지역 신문에 실린 게일 목사의 부고 기사. 1937년 2월 게일 목사 묘소 앞에선 부인과 딸 사진(외손녀 로즈마리 여사 제공)
# 게일 목사의 묘소를 찾아내다

이날 마지막 목적지는 바스를 사방으로 둘러싼 언덕 중 북쪽 지역인 란스다운(Lansdown)의 묘지. 게일 목사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내린 빗속에 묘비들 마저 대부분 쓰러진 오랜 묘원, 흐릿한 묘비명을 확인하며 이름만으로 그 위치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몇 주 뒤, 주말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청년들과 재차 방문하기에 앞서 자료를 조사해 이번에는 수월하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펼친 성경 모양의 묘비는 들꽃에 덮였고, 주변에는 웃자란 풀들이 무성했다. 소박한 묘에 둘러서서 청년들을 향해 이들과 비슷한 나이인 25세에 미지의 땅, 한국에 와서 40년을 함께 생활하며, 함께 거칠고 낯선 음식을 먹고,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우리들이 지금 부르는 '하나님' 이름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 이곳에 누워 계시다는 설명을 하니 모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지난 여름 게일 목사 묘소 위치를 확인했다는 소식에 대한성서공회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갖고 재단장과 관련한 자료를 요청해 왔다. 영국에서 교회 당회록은 중요 기록물로 분류돼 현재 오래된 당회록과 교회 기록은 고문서 보관소에서 열람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록다운이 완화되기를 기다려 지난해 가을 예약을 하고 다시 한번 바스를 찾았다. 그래서 1927년부터 당회록을 한 쪽씩 넘겨가다 마침내 '1928년 4월 30일 자' 기록에서 교인 등록에 대한 기록과 이어 시차를 두고 당회원으로 섬겼던 기록, 나아가 당회록을 기록하고 직접 서명해 남긴 기록 등을 찾아낼 수 있었다.

후에 자료를 확인하니 게일 목사는 당초 캐나다 밴쿠버 정착을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캐나다를 방문해 가족들과 대학 친구들과의 반가운 만남을 갖기는 하였으나 캐나다 교회는 당시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교단이 연합하고 잔류하는 교회들의 모습들이 4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당시 게일 목사는 이미 아시아 전문가로 인정 받아 의회 도서관에서 연구자로 초빙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은 아내의 고향인 영국에 정착하기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영국의 도착해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또 후에 당회원으로 섬겼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이후 그의 사역은 영국 내 선교사회 모임, 성서공회, 국제 관계 사역은 물론이고 찰스 디킨스 협회를 비롯한 문화계에서 명성과 왕성한 지도력을 발휘한 현역의 모습을 보게 된다.

게일 목사의 삶은 캐나다에서 25년, 한국 땅에서 40년 그리고 마지막 10년이 영국에서 이뤄졌다. 사람은 인종과 신분 빈부에 관계 없이 품었던 그였고, 어디에 머물든지 그 땅의 공기를 숨쉬는 음식도 잠자리도 말과 글도 소중히 여기며 받아들였던 인물이었지만 신앙적 소신만은 대쪽 같았던 그였다. 이것이 때로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영국에서의 면모 또한 다르지 않았다.

브리스톨 인근에 살고 있는 게일 선교사의 외손녀들인 로즈마리(맨 우측)와 웬디(맨 우측서 두번째)와의 만남이 2020년 10월 극적으로 이뤄졌다. 필자의 부인(홍윤주 선교사)이 게일 목사가 사역했던 연동교회 출신이라 웬디 여사는 외조부가 시무했던 교회 출신이 선교사가 되어 영국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했다. 왼쪽에서 두번째는 더기 목사.
# 후손들과의 극적인 만남

이렇게 영국에서 게일 목사의 광폭 행보와 묘지 재단장을 위해 자료를 찾던 중에 다양한 게일 연구자들이 연결되었다. 이들을 통해 게일 목사의 외손녀 가운데 한 분이 브리스톨에 거주한다는 단서를 입수하고는 인명록을 뒤졌다. 그리고 불과 일주일이 못되어 만남이 이뤄졌다. 2013년 게일 목사 탄신 150주년을 맞아 한국을 다녀 온 적이 있는 두 외손녀는 갑작스런 만남에도 외조부가 사랑했던 한인들의 신앙공동체가 브리스톨에, 더구나 게일 목사께서 시무했던 교회 출신이 선교사가 되어 영국에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마지 않았다.

대화 중 묘지 재단장 의사를 전달받고는 1937년 외조부의 장례를 치르며 한국말로 비문을 함께 새기지 못한 데 대한 가족들의 아쉬움이 컸음을 전하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지역 언론에 보도된 부고 기사에는 한국 사역에 대해서도 기록과 함께 바스에서의 9년이 채 되지 못하는 기간 그의 왕성한 활동에 대한 내용이 가득했다. 이제 반 년 가까운 록다운이 해제되면 다시 그의 자취를 찾아 떠날 남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김보현 목사 / 총회 파송 영국 선교사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