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소식을 전할 것인가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소식을 전할 것인가

김덕영
2019년 12월 16일(월) 10:00
교회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이 땅의 가난한 자들이 외치는 생존의 위기를 목격한다. 무거운 부채에 눌린 자, 불투명한 미래에 희망을 잃은 자, 주위 도움의 손길을 뻗을 곳이 차단되어 고립된 자, 사는 것과 죽는 것의 나은 것을 확신할 수 없어 생의 경계에 선 자, 마음 나눌 친구를 찾을 길이 없어 홀로 우는 자, 당장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일터에서 오늘도 소리 없이 죽어가는 자, 억울하게 죽은 가족으로 오늘도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자의 호소가 들린다. 오늘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공동체는 누구인가. 교회의 위기는 오늘 가난한 이의 처절한 위기에 응답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희년은 이 땅의 가난한 이웃에게 절박한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가 너덜너덜하고 찌질한 나의 삶에도 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늘 우리의 책임과 실천으로 가능하다고 말해 줄 친구가 있는가. 적어도 이 땅의 하나님 나라, 너의 삶의 회복을 위해 지금 나는 모든 것을 걸 수 있다고 고백하는 존재가 있는가. 여전히 세상의 가난한 이들의 처절한 신음이 묻고 있다. 그들에게 희년이 가능하다고 삶으로 말해줄 존재는 누구인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성령을 받고자 하는 자는 누구인가. 세상은 온통 각자 생존을 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치열하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당장 내일의 나의 생존이 위태롭다. 하나님 나라와 희년은 한가한 사람들이 꿈꿀 수 있는 몽상이던가, 조금이라도 자기 자리를 확보한 사람들이 내세까지 장악하여 외치는 거짓 이데올로기이던가.

절망의 한 복판에서는 역설적으로 즐거운 비명이 여기저기 터지고 있다. 강남 집값은 물론이고 강북 집값이 들썩인다. 한 해 2, 3억이 올라가는 집값에 부동산 신화는 더 강고해지는 듯하다. 욕망의 물줄기를 한 번 맛본 이는 목마름을 더욱 느끼는 법이다. 그 맛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이들도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고 욕망의 전차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욕망은 내일의 안정을 확보하고자 나의 존재를 던지기까지 추동하지만 주거비 상승으로 신음하는 이웃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마음과 뜻과 지혜를 다해 모든 부동산 정보를 모으고 간절히 바라며 존재를 걸고 도전한다.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가. 부동산을 섬기는가. 오늘 우리는 무엇을 예배하고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나의 생존의 근거가 하나님인지, 돈인지를 묻는다.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다른 욕망보다 더욱이 하나님을 간절히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어떤 가치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나는 과연 원하고 있는가.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할 정도로 예수님이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나는 과연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저들의 강렬한 욕망을 넘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예언자들과 가난한 이들은 희년을 더욱 간절히 욕망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가 되기 원했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외쳤던 예수를 따르는 한국교회는 오늘 무엇을 욕망하는가. 한국교회가 모든 역량을 모아 가계부채에 신음하는 이웃에게 회복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가. 교회가 서로 힘을 모아 열악한 주거환경에 갇혀 있는 청년들에게 새로운 주거환경과 공동체를 제시하는가. 각자 생존을 도모하는 세상에게 우리가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줄 것인가. 생존의 밑바닥에서 버둥거리는 이웃에게 한국교회가 희년의 선물을 줄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성령을 받고자 하는가.

김덕영/ 희년함께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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