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뿌리 내린 교육선교의 열매들

곳곳에 뿌리 내린 교육선교의 열매들

[ 땅끝편지 ] 인도네시아 김동찬 선교사 <4>이슬람 강국에서 새싹 기독교학교를 통한 선교

김동찬 선교사
2022년 05월 10일(화) 08:40
전통춤으로 손님을 환영하는 초등학생들.
1993년 첫 새싹유치원을 개원할 당시 모습.
무슬림이 다수인 인도네시아에서 제일 긴장하고 신경을 쓰는 일은 비자 연장이다. 어느 날 이민국에서 일을 보는데 창구에 있는 한 여청년이 상냥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 "저는 새싹 초등학교 졸업생이에요." "아! 그렇군요. 반가워요."

이 청년이 내가 새싹((Tunas Baru)학교를 설립한 선교사인 것을 알고 마음을 다해 나의 일을 도와주었다. 이십 여 년 동안 이민국에서 비자 진행을 하면서 이 날처럼 푸근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비자를 진행해 본적은 없었다. 요즘 관공서나 회사 사무실들에 가게 되면 심심찮게 우리 학교 졸업생들을 만나게 된다. 29년 동안 배출된 수천 명의 졸업생들이 사회 각처에 들어가서 자신의 몫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뿌듯하고 교육사역의 열매에 감사한다. 새싹학교 출신 졸업생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 사회 각 분야에 진출했다. 교사, 목회자, 회사원, 공무원, 경찰, 사업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자신의 자리에서 재능과 은사를 따라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지난날 힘들었던 일들이 오히려 감사가 된다.

바탐은 30여 년 전부터 갑작스런 도시화로 급증하는 아이들을 수용할 학교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막 형성되는 철거민 촌에 아이들을 위해 유치원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그만 가정집을 빌려 마당에 합판과 나무로 교실 하나를 짓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15명의 아이들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찾아왔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마치고 초등학생이 될 때는 나무와 판자로 된 벽은 흰개미들이 갉아 먹어 구멍이 숭숭 나 벽은 쓰러지고 지붕이 내려앉고 있었다.

우리들은 현지의 언어, 문화, 교육 시스템을 잘 알지 못하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려고 교육을 시작했다. 교육은 지금보다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줄 뿐 아니라 어려운 삶을 뚫고 나오게 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이 나라 헌법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종교 교육이 의무로 되어있다. 즉 이슬람교도에게는 쿠란을, 기독교인에게는 성경을 가르칠 의무와 권리가 있다. 비록 인도네시아 기독교인 수가 8%정도이지만 이들에게도 학교에서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국가가 보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국공립학교에 가면 성경을 배울 기회가 거의 없어진다.

기독교학교에서는 성경을 정식 과목으로 일주일에 2시간씩 가르치고 매일 등교하면 수업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이 학교에서 예배를 드린다. 기독교학교 설립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단 학교가 세워지면 기독교학교는 복음전도와 선교의 기회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철거민촌의 빈민들을 위한 교육의 기회를 주셔서 지금은 9개 학교에서 2600명의 학생들이 복음 안에서 공부하고 있다.

20여 년 전에는 여름에 학교 운동장에서 한국 청년들이 공연하고 선물로 줄 달린 볼펜을 나눠주었는데 이미 받은 아이들도 그것을 목에 걸고 하나 더 받으려고 앞쪽으로 달려들었다. 그 줄이 다른 아이의 몸에 당겨져 아이가 목이 졸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300명 넘는 아이들이 모두 볼펜만 보고 앞으로 달려갔다. 마침 그 아이를 보고 목에서 줄을 빼주었는데 아찔했다. 그때 아이들에게는 작은 볼펜도 그렇게 귀했다.
섀싹중고등학교 전경.
새싹중학교 졸업식.

요즘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이들이 학교에 올 수 없어서 비대면 수업을 하는데 집에 핸드폰이 하나밖에 없는 가정이 있다. 아버지가 일하러 갈 때 핸드폰을 들고 나가면 아이들이 수업을 받을 수 없는데, 형제가 많은 집은 더 어렵다. 가난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학교를 운영하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다. 선생님의 월급을 줄 수 없을 때도 있고 교실이 부족해서 3부제 수업을 오랫동안 했다. 교육 전문가도, 행정 전문가도 아닌 선교사들이 학교를 시작하면서 좌충우돌 실수를 많이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나라 교육 시스템을 알게 되고 이 사람들을 이해하면서 학교 행정이나 운영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는데 외국인, 그것도 선교사가 일을 시작하고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하나님이 어려운 위기마다 이길 길을 열어 주셔서 지금은 바탐섬 서민 지역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을 가장 보내고 싶어 하는 학교가 되었다.

29년을 지나면서 우리 학교가 발전한 것은 한국교회가 필요할 때 마다 교실을 지어주었고 재정이 없어 교사 봉급을 줄 수 없을 때는 후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경제가 성장하면서 매년 최저임금이 올라갔다. 어느 해는 봉급이 100% 인상한 때도 있었고 3년 만에 200% 인상하는 급속한 변화가 있었다. 지금은 학생들이 내는 학비로 교사 봉급을 주고 정부의 지원금으로 학교가 자립하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우리는 현장을 지킨 것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많은 일을 이뤄주셨다. 이곳에서 동역하는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의 아낌없는 물질과 기도의 후원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뤄진 일이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김동찬 목사 / 총회 파송 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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