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100년현장을가다 ] 마산 문창교회와 창신학교
이경남 기자 knlee@pckworld.com
2019년 11월 26일(화)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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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교회가 마산지역 삼일만세운동의 근원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형준 목사는 "당시 기독교인들은 가장 개화된 의식을 갖고 있었고, 개화 의식은 곧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는 애국의 마음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는 일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운동가를 초청해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강연을 듣는 기회를 마련하는 등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당시 문창교회 담임목사인 한석진 목사 또한 성도들에게 자주독립 정신, 주체성, 용기 등에 대해 설교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한 헌신을 강조하고 몸소 실천했다. 교회가 세운 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곧 교인들이자 삼일만세운동의 주동자가 됐다. 이 가운데 이승규 장로, 이상소 장로(창신학교 부교장), 손덕우 장로 등은 항일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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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13일,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이갑성이 마산에 도착했다. 친구인 임학찬(창신학교 교사) 소개로 이들은 이상소 장로 집에 모였고, 이갑성은 서울의 3.1만세 계획을 알리고 함께 궐기할 것을 요청했다. 이어 이용상(세브란스의전 학생)은 독립선언서 600여 매를 대구와 마산 민족주의자들에게 전달하고, 임학찬, 이상소 장로는 이형재를 통해 김용환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넨다. 김용환은 3월 3일 오전 11시 경, 문창교회에서 2km 남짓 떨어진 무학산에서 고종황제 국장 망곡제에 운집한 시민들에게 연설을 한 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날 거사에는 문창교회가 세운 창신학교, 의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대거 가담했다. 학생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눠주고 만세행진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은 학교로 와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선언 선포식을 거행했다. 3월 3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이어 일어났다.
3월 10일 추산정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본헌병은 가담자 전원을 체포 구금했다. 그러나 민족 지도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3월 22일 구마산 정기장날 또 한번 마산 지역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위해 교사 임학찬, 김필애와 이들을 따르던 학생 최봉선, 김남준, 이수학, 안음전 등은 최봉선의 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선언서와 격문을 등사한다. 창신학교 학생들은 라대궐 교장(선교사)과 이성갑의 도움으로 학교 등사기를 이용해 수천 장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3월 22일 12시 정각, 열차가 기적을 울리자 수 천 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궐기해 격문을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15살이었던 최봉선(최용규 여동생)은 이날을 위해 학생들과 결사단을 조직해 삼일만세운동을 계획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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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소 장로는 마산 3.3만세운동에 가담해 배후 조종과 주모자로 검거된 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문창교회 교인이자 창신학교 교사였던 최용규는 마산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을, 교사 임학찬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형을 받았다. 그러나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3월 3일 창신학교 학생들이 불붙인 만세운동은 7~8회에 걸친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민족의 등불이 된 교회
1901년, 호주 선교사 손안로 목사에 의해 설립된 문창교회는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교회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이어가며 민족의 등불이 되었다. 창신학교는 민족의 정신적 단결 집약을 위해 '창신 악대 전도대'를 구성해 경남 지역에서 3년간 전도운동까지 전개했다. 문창교회와 교회가 세운 기독교 학교는 항일 구국운동의 거점이었고 끝까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00년 전 한국교회는 민족과 시대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앞장섰다. 100년이 지난 오늘 절망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한국교회는 희망의 빛이 되고 있는지, 아픔을 충분히 함께 나누고 있는가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경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