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역사의 현장에 교회가 있었다

잊혀져가는 역사의 현장에 교회가 있었다

[ 3.1운동100년현장을가다 ] 결산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9년 12월 06일(금) 08:00
대구 남산교회 건물에 부착돼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조형물.
밀양 지역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춘화교회 임융식 목사(우)와 노준남 장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3.1만세운동의 시작과 전개 과정에서 교회가 중추적 역할을 감당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본보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됐던 교회'와 '이를 주도한 교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현장'을 방문, 100년 전 한국교회가 어떻게 민족의 아픔을 품으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는지 조명했다. 지난해 6월부터 보도된 총 14회 기획은 안동, 밀양, 광주, 부산, 서울, 김포, 익산, 대구, 군산, 진주, 제주, 양평, 마산 등의 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중심이 됐던 교회를 기자가 직접 현장 취재를 통해 3.1운동의 전개 과정과 기독교인들의 역할을 청취하고, 당시 신앙인들의 순수한 믿음과 민족애를 고증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이번 기획을 통해 본보는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을 평화운동으로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복음의 정신을 구현했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이 땅의 자유와 평등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기독교인들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정부, 의병, 유생 등 주요 조직과 체계가 마비된 상황에서 교회의 모임, 연락망, 상호신뢰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만세운동이 전개됐던 골목길을 따라가면 교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장로, 조사, 평신도였던 그들은 말씀과 기도를 의지했으며, 교회는 그들을 지원하고 구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독립운동은 멋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비참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본보는 취재를 진행하며 '독립운동가들의 순수한 신앙과 삶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모델로 삼아야 할 지표'임을 알게 됐다. 이런 차원에서 더 많은 연구와 발굴 지원을 요청하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시작

여러 지역에서 만세운동의 시작이 교회 종소리에 맞춰졌다는 고증이 나왔다. 안동에선 3월 13일 안동교회 종소리에 맞춰 시위가 준비됐지만 계획이 발각되면서 김영옥 목사와 김병우 장로가 구금됐고, 결국 조사 이상동이 혼자 만세시위를 벌이자 체포됐으나 11개 교회로 이어졌다. 이상동은 수감중에도 복음을 전했으며, 감옥에서 회심한 사람 중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 총회장 이원영 목사도 있다. 진주에선 3월 18일 진주교회의 정오 종소리에 맞춰 1만 여 군중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당일 교회 종탑을 강제 철거했으며, 현재는 복원한 종탑만 남아 있다.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학생들은 양림리교회 위 언덕길에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광주 수피아여자고등학교에 있는 만세운동 기념 조형물.
장소

만세운동이 시작된 장소는 장터가 가장 많았다. 장터에서의 감격이 다시 거리와 골목으로 이어졌다. 1919년 3월 23일 사람이 많이 모인 김포 오라니장터. 작게 만세 소리가 들리더니 일순간에 온 장터가 만세 함성에 휩싸였다. 울분과 감동에 북받친 사람들은 모두 얼싸안으며 눈물을 터뜨렸고, 두려움을 이겨낸 만세 함성은 29일까지 다른 장터와 마을 곳곳에서 불시에 울려퍼졌다.

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의 회의장소가 되기로 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비밀공작소가 되기도 했다. 남대문교회 조사 함태영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때 우리들의 연락장소는 교회 관계의 예배당, 학교, 병원이었으며, 이런 곳은 가장 진지한 독립투쟁의 협의처였고, 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들은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주일학교 선생, 학교교원, 전도부인들은 모두가 민족사상의 고취자였고, 신도와 학생들은 적극적인 애국자이며 열렬한 민족운동의 실천인들이었다.'

교회와 함께 가장 많이 등장한 곳이 기독교 학교다. 교회와 선교사들이 민족의 개화를 위해 학교를 세웠고, 그곳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배운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이외에도 병원, 교인의 집, 공원, 거리 등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주동자

많은 밀정들이 있었던만큼 시위를 준비하고 거행하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14회 기획에는 목사 15명, 장로 18명, 조사 4명 외에도 여러 교인들의 활약이 소개됐다. 이 중엔 독립·계몽운동에 힘쓴 여운형 선생, 임시정부 지도자였던 김규식 장로, 독립협회 총대위원 장붕 장로, 상해 신한청년당을 조직한 서병호 장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한 김순애 권사 등도 있었다. 만세운동 주도자 중에는 30대와 20대도 많았다. 3월 21일 제주도의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조천교회 김연배 집사는 당시 24세였으며, 당시 독립선언서를 제주도에 들여온 김장환은 서울 휘문고보 4학년 학생이었다.


통계

올해 KBS가 관련 자료를 모아 작성한 '만세지도'는 누적시위 1921건, 참여자 121만 197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전체 인구가 1678만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제 참여는 국민의 10%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기독교인들의 참여는 본보의 취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대구지역에선 주도자의 90%가 기독교인이었으며, 광주의 경우 참가자 중 기독교인 비율이 50%를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 출신 항일투사는 140명 중 49명이 기독교인인 것으로 조사됐다.


애국과 신앙

본보가 인터뷰한 여러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애국이 곧 신앙'이라는 말로 당시의 신앙관을 표현했다. 또한 "여러 갈등 속에 이뤄진 만세운동 참여도 결국 신앙적 결단이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부산진교회 100년사'는 3.1운동과 관련해 '3.1운동의 기독교 참여는 교회의 참여라기 보다 기독교인 각자의 신앙적 결단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회록에서 특별한 기록을 하고 있지 않다'고 명시하고 있다. 취재를 도운 한 신학자는 "독립운동은 자유와 평등에 가치를 둔 신앙운동이었으며, 당시 기독교인들은 민족과 교회의 운명을 동일시했다"고 강조했다. 1919년 5월 제주에선 교회들이 협력해 4450명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일도 진행됐다. 3.1운동 이후에도 교회는 민족의 동반자 역할을 감당했고, 위상은 크게 향상됐다. 김포중앙교회 111년사는 '교회가 독립운동에 동참하면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 영향인지 1920년대에는 새로 입교하거나 들어오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기록한다. 새문안교회 1920년 1월과 1921년 11월 제직회록엔 헌금을 투옥성도 돕는데 사용하기로 결의한 기록도 남아있다.


옥고

기독교인들의 지도력과 능동적 참여로 만세운동이 진행된 만큼 그 피해는 매우 컸다. 시위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체포돼 옥살이를 했으며, 출옥 후에도 고문후유증에 시달렸다. 본보의 취재로 파악된 당시 형량을 보면 안동교회 교인으로 만세운동과 관련해 가장 높은 형량을 받은 유연성은 7년 형, 한 팔을 잃고도 끝까지 항거한 광주 수피아여고 윤형숙은 4년, 대구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만집 목사는 3년, 김태련 조사는 2년 6개월, 마산 만세운동에 앞장선 이상소 장로는 2년 , 교인이자 창신학교 교사였던 최용규 1년 6개월, 교사 임학찬은 1년, 독립선언의 정당성을 밝힌 '12인 등의 장서'를 작성한 김백원 목사와 차상진 목사는 각 1년, 제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시범 김시은 김연배 등은 1년, 양평 만세운동을 이끈 신우균 여운긍 여광현은 90대의 태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대구 취재에선 부자(父子)가 함께 옥고를 치른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다. 김태련 조사와 함께 참여한 장남 김용해는 일본 군경의 구타로 출옥 20일만에 죽음을 맞았으며, 둘째 아들도 박해에 시달리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대구 YMCA 초대회장 이만집 목사는 아들 이성해와, 계성학교 교사 권희윤은 아들 권영화와, 신정교회 정재순 목사는 아들 정원조와 함께 투옥돼 고초를 겪었다. 24세의 나이로 제주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28세에 요절한 김연배 집사의 묘비엔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주님을 굳게 믿음으로써 마침내 틀림없는 영원한 삶, 영생을 얻었다'는 의미의 한문 문장이 기록돼 있다.


안타까움

14회의 기획을 진행하며 현장에서 만난 독립유공자 후손과 역사학자들은 한 목소리로 선배 기독교인들의 소중한 이야기들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도시가 개발돼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고 인구 이동이 늘면서 역사 보전은 더욱 힘들어 졌다고 했다. 본보는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신앙 선배들의 이야기를 청취하며, 3.1운동 100주년이 기독교 역사의 가치를 깨닫고 교회가 발굴과 기록에 힘쓰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했다.

차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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