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 목양칼럼 ]

안성덕 목사
2024년 02월 29일(목) 14:06
"목사님, 자꾸 이러시면 저 큰 교회로 갈 거예요." 혹여 꿈에 들어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농담을 성도들은 표정 하나 안 바꾸며 쉽게 내뱉을 때가 있다. 개척교회 목사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인 것 같다. 자주 듣지는 않았지만, 이런 말을 몇 번 들었다. 컨디션이 좋으면 웃으며 농담으로 넘길 수 있지만, 힘든 상황에서 들으면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온다. 물론 진짜 떠날 사람은 이런 농담을 하지도 않는다. 그냥 조용히 사라진다.

목회자는 성도를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으로 알고, 그분들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안고 새벽마다 기도한다. 그런데 형제나 누이처럼 여겼던 성도가 마치 학원을 '끊듯' 단숨에 관계를 도려낼 때가 있다. 물론 필자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 없이 믿음이 약한 성도를 돌보다가 일방적으로 차단당하는 일도 있다. '우리의 관계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나? 서로 울고 웃으며 기도 제목을 나누던 순간은 그저 신기루였나?' 단숨에 남보다 못한 관계였던 실체가 드러나면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은 목회자의 숙명이다. 이별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목회자로서 적응하기 힘든 일이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원수처럼 헤어진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멀리 이사하거나 해외로 이민 가는 경우 혹은 가정사 등으로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었다. 모든 이별이 아프지만 유독 떠나보내기 힘든 성도들이 있다. 공들여 전도했거나 어려움의 시간을 함께 눈물로 헤쳐나간 성도들, 교회가 정한 훈련 프로그램에 성실히 참여해 눈부시게 영적으로 성장한 성도들, 누구보다 열심히 숨은 곳에서 교회를 섬기며 목회자와 성도들의 사랑을 받던 성도 들이다.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떠나보낼 때의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필자는 성도들을 떠나보내기 힘들어하는 마음 깊숙한 곳에 '나의 의'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교회에 떠나보내기 아까울 만큼 신실하게 성장한 것이 모두 필자의 수고와 눈물과 기도의 결실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저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기도의 눈물을 흘렸는데?'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냉정하게 말하면 일단 필자는 그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양육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의 만남은 수많은 성도의 눈물과 여러 담임 목회자들의 말씀과 기도와 땀을 거친 후 시작되었다. 이미 다른 교회에서 좋은 십자가 군병이 되어서 온 경우도 많았다. 우리 교회에서 열매를 맺었을 뿐, 이전에 수많은 복음의 씨앗들이 이미 뿌려졌었다. 때가 무르익어 싹을 틔울 절묘한 시기에 우리 교회와 연결되었던 것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교회와 필자는 앞서 수고한 타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 대신 열매들을 누린 수혜자일 때가 많았다. 필자의 수고는 그 혜택의 극히 일부를 보답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정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 영혼을 천하보다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자라게 하셨다. 성령님의 역사 없이 성도는 자랄 수 없다. 그런데 필자는 성도들을 떠나보내며 내심 들인 수고와 공로를 아까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필자가 느끼는 헤어짐의 아픔을 '아까움'으로만 축소하기에는 억울하다.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떠나보내는 섭섭함이 진한 법이다. 그러나 떠나보낼 때 늘 조심하려고 한다. 행여 그동안 전심으로 사랑하며 섬기고, 양육하며, 기도해 준 시간에 대한 보상을 떠올리지 않기를.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큰 울림이 된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고전 3:6, 새번역)



안성덕 목사 / 남양주충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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