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ㆍ시골교회 상생,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도시ㆍ시골교회 상생,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 기획 ] <기획>대화가 대화를 만든다(도시 목회자 오창우 vs 시골 목회자 홍동완)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6년 09월 19일(월) 10:29

대담자:오창우목사(한남제일교회)ㆍ홍동완목사(도심리교회)
일시 및 장소: 9월2일 홍천 도심리교회

 도시와 시골은 그 환경이 다른만큼 교회가 처한 환경도 다르다. 본보 특별기획 '대화(對話)가 대화(大和)를 만든다'의 이번 주제는 '도시 목회자와 시골 목회자의 대화'이다. 이들은 도시교회와 시골교회의 전통적 구분 방식을 넘어 새로운 상생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새로운 이슈를 이끌어냈다. 언제나 '만남'은 예상치 못한 특별한 '케미(Chemistry)'를 일으킨다. 
 

오창우 목사(이하 오 목사): 한남제일교회에서 31년째 목회를 하고 있고, 학부 73기, 신대원 졸업도 73기이다. 도시에서만 자랐기 대문에 이런 깊숙한 농촌에 들어오는 것이 겁이 날 정도다. 그래도 이런 곳(도심리교회)에서 만나 행복하다.
 
홍동완 목사(이하 홍 목사): 저는 강원도 홍천 도심리라는 마을에 교회 개척한 지 8년째 되고 있다.
 
오 목사: 수많은 개척지를 나두고 왜 이런 시골 골짜기에 왔는가?
 
홍 목사: 원래 선교에 뜻이 있었다. 여기 오게 된 것은 선교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영성이 있는 선교사들을 훈련해서 선교지로 보내기 위함이었다.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 선교훈련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여기를 선택했다. 당시에는 교회 할 생각은 없었다. 선교공동체만 생각했었다. 사실 제가 처음 왔을 때 목사라는 것을 알고 마을 주민들이 기도원이나 장애인 시설을 세우는 줄 알고 출입금지를 시켰다. 계속 설득을 하고 약속까지 했다. 기도원, 장애인시설 설립 안할 것, 환경오염 시키지 않을 것 등에 대해 각서를 썼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까지 다짐을 받더라. 그 말을 듣는데 성령이 감동을 주셨다. '말'로는 안하지만 예수님의 삶과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오 목사: 마을 사람들이 먼저 교회를 짓자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 목사의 삶에서 어떤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홍 목사: 한 마디로 별 짓을 다했다. 농촌에는 일거리가 엄청 많다. 지금 이 곳에 30여 가구가 산다. 매일 가정 방문을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일을 같이 한다. 겨울에는 땔감해주는 일, 전기 집수리 등 같이 얘기 나누며 일 했다. 어제도 시멘트 바르는 작업, 전기 작업을 했다. 시골은 모터 펌프의 고장이 잦다. 이거 고치려면 출장비까지 10만원이 넘는다. 저는 공짜로 예비 부품까지 가지고 다니며 고쳐준다. 우리 마을 모터 펌프 고치는 일인자가 저다.
 
오 목사: 내가 홍 목사 이야기 들으면서 처음 한남동에 왔을 때, 그리고 교목을 했을 때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에 갔는데 제 서열이 교장, 교감, 그 다음이더라. 나이 30세에 영락고등학교 교목실장이었다. 주임들이 아버지, 큰 형님뻘 되었는데 서열 3위의 노릇을 못하겠더라. 어느날 교목실에 앉아있는데 개미 한 마리 안왔다. 이러면 안되겠다 아이스크림 사서 교무실에 올라가는 일을 제일 먼저 했다. 빵도 사서 놓고, 커피믹스도 놓았다. 그러니 내가 쓰는 교목실이 선생님 쉼터가 되기 시작했다.
 
홍 목사: 처음 교회 갔을 때는 어땠는가?
 
오 목사: 30여 년전 이태원은 술집 동네였다. 날이 어둑해지면 길거리에 술먹으러 오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밤에 지나가면 아줌마들이 술 먹고 가라고 나도 잡는다. "저는 옆에 있는 교회 목사입니다"라고 말씀 드리면, 여기 교회 잘 나가는 아가씨가 있다고 하더라. 그 마음에 지역교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이 지역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먼저 쌀을 가지고 동사무소를 가져갔다. 50포대를 나눠주고 싶은데 동장님이 선정해서 나눠달라고 했다. 동장님이 잘 협력하더라. 나중에 교회에서 쌀을 나눠주게 될 때에도 내가 사회 보지 않고 동장님이 사회보게 했다. 나는 기도만 해주었다. 나중에 보니 동장과 동직원들에게 굉장히 힘을 주는 일이었더라. 자기들의 실적이 되니까 승진도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존재나 교회의 가치를 인정했다. 이후 동사무소 직원, 환경미화원, 야경꾼, 우편배달부 등을 초청해 잔치를 해주었다. 자연스럽게 동네에서 좋은 소문이 났다. 그래도 나는 도시 사람이라 목사님처럼 나는 여기서는 목회 못할 것 같아. 어려움은 없나?
 
홍 목사: 솔직히 말하면 어려움은 없다. 아! 문화적인 면에서는 처음 어려움을 겪긴 했다. 농촌의 문화를 어떻게 우리 기독교 문화가 이해하고 기독교 가치관으로 바꿔나갈 수 있을까의 고민이 있었다. 이곳으로 온 초창기 정월대보름 노제(거리의 제사)에 저를 초청해 기도해달라고 하더라. 마을 제사의식에 목사인 제가 기도하면 좀더 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무엇을 따지기 이전에 저에게 그런 요청을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대보름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했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메시지를 넣어서 기도한 후 농사 잘 되게, 어르신들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이후 지역사람들간에 그 목사님 '신령기'가 있다는 말이 돌았다. 저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더라. 그 사건이 있고 난 4년 후 교회가 세워졌다. 실제로 거리제사 차리던 사람이 교인이 되니 거리 제사가 없어지게 됐다. 단오제도 제사행사다. 제가 마을에 반장 되면서 단오 축제로 바뀌게 됐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를 한다. 마을 임원회의를 하면 우리 교회 회의인지 마을회의인지 구분이 안가더라. 마을 회의에서도 "아멘, 아멘" 소리가 나온다. 아직도 모였다하면 술을 마시곤 하는데 이것도 서서히 바꿔나가려고 한다. 반장 7년째다. '술없는 도심리, 행복한 도심리' 외쳤더니 아직은 안받아들여지더라. 하하.
 

오 목사: 이태원의 문화 역시 바꾼다는 것이 어렵다. 도시인들을 '도시난민'이라고도 한다. 홍천은 지역의 전통적 문화에 물들어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정착해 사는 사람 아닌가? 우리 동네는 구성원들이 너무 빨리 물갈이 된다. 이태원은 교육, 생활환경 등이 대단히 어려운 곳이다. 그야말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다. 한남동은 부촌이라고 하지만 우리 교회의 건너편은 재벌이 사는 동네고, 우리 교회 뒷쪽은 어려운 분들이 사는 동네다. 익명성을 요구하는 동네다. 그 사람이 어디 출신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직업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 힘든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가 찾은 방법은 교회와 성도 모두 당당해지자는 것이다. 예수 복음으로 가난해도 당당하자. 있다고 교만하지 말고 없다고 비굴하지 말자고 말한다. 홍 목사님이 어려운 점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도 복음을 붙들고 있을 때 어려운 것이 없더라. 사회적인 형편으로 비교하면 땅 한평 없이 사는 너무 비천한 분들이 많다. 뉴타운 이야기가 14년간 지속되면서 교인들이 자꾸 떠난다. 우리 교회에는 편의점에서 밤새 일하고 80만원 버는데 월세 40만원 내는 교인들이 꽤 된다.
 
홍:보편적 도시문화는 아닌 것 같다.
 
오: 실제 도시인 중에는 도시난민이 많다. 도시인들은 이러 이러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서울 아파트촌에 정규적인 안정된 수입을 가지고 사는 사람보다는 가난하고 열악한 도시인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농촌은 난민은 아니다. 도시인은 난민이다. 그래서 서울시장도 요즘은 도시 난민들을 대상으로 정책을 편다. 가진 자들은 저항하고 반대하긴 하지만. 너무 가난하고 어려운 진짜 어려운 이들이 많은데 많은 도시인들이 이러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강남은 부촌이라고 하는데 강남 뒷골목에도 도시난민들이 많다. 방한칸 반지하에 사는 가정들이 많다. 서울은 도시 난민들의 집단이다. 농촌보다 도시난민들이 더 힘들고 어렵게 산다. 원룸, 고시원을 전전하면서….
 
홍: 우리 농촌도 비슷한 형편이다. 귀농자들이 많다. 전에는 귀농자와 원주민이 3대7이었는데 이제는 7대3으로 역전됐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에 있는 교회를 전통적인 농촌교회라 할 수 있을까? 우리 교회 성도들도 귀농자, 원주민이 반반이다. 농촌에 있기 때문에 농촌교회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 구례에서 목회하는 친구의 교회도 절반 절반이더라. 토박이들과 귀촌자들의 갈등이 있더라. 토착민들이 많은 곳에 가면 왕따가 된다고 오히려 외딴 곳으로 가는 귀농자들이 많더라. 교회가 이러한 문제에도 눈을 떠야 한다. 그건 그렇고 홍 목사님은 재정적으로 어렵지는 않은가?
 
홍 목사: (이 대답은 옆에 있던 홍 목사의 아내가 대답했다) 저희는 선교사라는 마인드로 자비량 사역자, 즉 텐트메이커로 출발했다. 후원자들도 모집하기 시작했다. 1996년에서 2000년까지 호주에 살면서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훈련받기 위해 나갔다. 그러다 다시 들어왔기 때문에 선교후원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지만 돕는 분들은 당신들이 선교사로 나가지 않지만 선교사의 삶과 다를바 없다고 50만원 정도의 후원금이 들어왔다. 한달, 일년을 지내다보면 어떻게 채워졌다. 남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 계획성도 없고 힘들어 내가 직장에 나갔다. 그런데 그것도 제가 아프면서 일년을 휴직을 하고 수술을 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일을 해서 먹고 사는게 아니라 은혜로 먹고 산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다 내려놓았다. 오히려 지금은 풍성한 축복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다.
 
오 목사: 사정을 더 자세히 말해달라.
 
홍 목사: 한주에 헌금이 10만원 정도다. 50만원은 강원노회에서 자립대상교회 지원금이다. 사례비는 따로 받고 있지 않다. 후원해주셨던 분들의 후원이 들어온다. 농촌은 급식비, 학비가 고등학교까지 무료다. 자녀가 감사하게 장학금 받고 다녔다. 휴학 한번 없이 다녔다. 노회에서도 장학금도 나오고, 군청에서도 장학제도가 있고, 자기가 공부만 잘하면 되더라. 도시난민들은 학자금대출, 빚이 쌓여가지 않나? 기계적 문화의 혜택만 받지 못하지 그런 것만으로 따질 것은 아니다. 여기 환경이 너무 좋지 않나? 적은 금액으로 만족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목사님은 좀 넉넉하지 않으신가?
 

오 목사: 나는 그렇게 부족하지 않다고 느끼지만 실제적으로 어려움도 있었다. 교인들의 생활수준으로 살아야 하니까 어려움이 많았다. 목회자가 삶의 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많았다. 항상 마이너스 통장을 쓴다. 많아서 쓰기 때문에 넉넉한 건 아닌 것 같다. 우리도 적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옷과 화장품도 잘 못산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들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켰다. 도시 목사라고 해도 우리 노회에서 보면 넉넉한 목사들 별로 없더라. 본이 되기 위해 교회에 내는 돈도 많다. 어렵다고 하면 어려운 이야기밖에 할 게 없다. 부함과 가난의 기준을 돈의 액수로 이야기하는 것은 목사의 자존감과 연관되어 있다. 돈은 없지만 부자다. 내가 어려운데 부목사들은 얼마나 어려울거야? 얼마 전에도 길 가다 14만원짜리 양복사는 곳이 있어 나도 사 입고 부목사들까지 불러서 사주었다. 담임 목사가 14만원짜리 샀는데 지들은 더 좋은 거 고르더라. 하하.
 
홍 목사: 교회가 영성공동체이기도 하지만 생활공동체의 모습도 있지 않나? 교회는 두가지 모습을 다 갖춰야 한다. 우리의 소유도 영성 안에서 어떻게 공유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교회 내 하늘땅공동체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곰취를 공동으로 생산하면서 이익금을 나누고 있다. 교회를 가면 헌금해야 한다는 부담을 성도들이 갖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우리 교회가 헌금을 거둬들이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아니라 나누고 베풀고, 물질 흐름의 통로가 교회가 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수익금을 잘 나눈다. 같이 나물도 뜯고 포장도 하면서 서로 이야기 나눈다. 신앙 전수가 되더라.
 
오 목사: 저도 도시 안의 공동체를 어떻게 이뤄갈 것인가가 숙제다. 현재 복지 정책이 공동체를 이루는 복지의 형태로 가고 있다. 돈을 나누는 것뿐 아니라 공동체성을 이루는 것이 숙제다. 마을공동체를 만드는데 교회의 역할을 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도 마을 사람들을 도울 때 전도를 하려는 것으로 오해를 많이 받았다. 구청에서 우리를 믿어주기 때문에 마을공동체를 이뤄나가고 있다. 마을공동체 내에서 크리스찬의 영향력, 교회 존재의 가치를 알게 하는데 주력한다. 이제 사실 공동체 얘기는 예수쟁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도농교회의 상생도 너무 물리적으로 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본다. 도시교회라도 당장 어려운 이들은 생협의 상품들을 비싸서 못먹는다. 시장에서 싼 것 사먹는다. 상생이라고 강요하는게 무리가 있더라. 상생에 대해 반대는 아니지만 농촌교회의 자존감을 먼저 찾는 것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홍 목사: 접근의 문제다. 교회와 교회, 기관과 기관으로 보는 접근 보다도 각각의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과 구성원간의 상생의 관점으로서의 접근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번 시도한 여름 사역중 하나가 팜스테이다. 도시교회가 농촌교회 봉사를 섬기면서 봉사하고 가시는데 이러한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가 원했던 복음의 전파라는 관점에서 얼마나 달성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 인격과 인격과의 만남을 시도하려고 했다. 한 집에 이틀 삼일을 보내면 깊은 교제를 하게 된다. 이걸 하고 났더니 피드백이 너무 좋더라. 옥수수 나올 때, 고추 나올 때 연락하라며 내가 팔아주겠다고 하더라. 이런 분들이 조금만 더 연결되면 농산물의 판로가 생긴다. 그리고 서로의 어려움을 알고 인격적 교류와 기도가 오간다. 지역교회에 바로 영향을 준다. 이렇게 우리 교회에 나오겠다는 분들이 몇 분 계시더라. 농촌과 도시교회의접근을 조직체가 아닌 인격과 인격과의 연결로 변화시켜야 한다.
 
오 목사: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행위 이전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먼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봉사했던 집의 감자를 사는 것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사는 것이 된다. 농촌도 우리는 어려우니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물건과 물건만 오가는 장사행위는 사실 서로 불편해질 수 있다. 관계를 많이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농촌교회도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는 한 상생은 어렵다고 본다.
 
홍 목사: 저도 동감이다. 저는 도움 받는다는 생각을 절대 안한다. 오히려 저도 당신을 도와준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인 기버와 테이커의 관계는 안된다.
 
오 목사: 도시교회가 봉사활동을 갈 때 비전트립 간다는 개념으로 가면 100% 실패한다. 우리가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배우러 간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시골교회나 도시교회가 서로 당당해야 한다.
 
홍: 시골교회가 받을 준비만 하는 것은 안된다. 그런 모습이 시골교회에 완전히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 예로 정릉교회와 우리교회가 형제교회를 맺었다. 누가 누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한국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도시교회에 농촌교회가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다.
 
오 목사: 내가 경험했던 농촌교회는 목사가 교회에 없다. 다 성장 세미나에 가 있다. 이건 아니다. 교회는 점점 힘들어진다. 성장 세미나가 아니라 자기를 성숙시키는 성숙 세미나에 가야 한다. 자기의 자존감을 세워야 한다. 교회를 자꾸 돈과 결부 지으면 안된다.
 
홍 목사: 이제는 도시와 농촌의 전통적인 구분이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에도 초고속 인터넷과 자동차가 다 있다. 도시와 농촌에서 문화와 가치관, 구성원까지도 분리하기가 어렵다. 이사 온 분에게 자연농법에 대해 강의를 한참 하다보니까 서울대 농대 나온 분이더라. 저희도 잠실에서 살아도 봤지만 여기가 더 좋다. 서울에 사는 사람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오: 정부와 사회는 농촌에 대한 의식이 변하는데 우리 교회는 아직 그 의식이 못미친다. 그래도 나는 깜깜하면 못살아. 솔직히 일주일도 못살 것 같아. 하하. 그래도 이런 시골에서 홍 목사 만나서 너무 좋다.
 
홍 목사: 저도 목사님 뵈서 너무 반갑고 좋았다.


<진행ㆍ정리=표현모 차장 hmpyo@pckworld.com>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