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신문의 출발, 기독교인이 뿌리

개화기 신문의 출발, 기독교인이 뿌리

[ 아카이브 ] 프로테스탄트와 신문

박만서 기자 mspark@pckworld.com
2022년 01월 11일(화) 12:50
1956년 1월 일자 2면 최준의 '프로테스탄트와 신문'
"귀보(기독공보)는 기독교계의 주간지로 더구나 요새 말이 많이 떠도는 순한글체의 신문으로 독특한 지반을 개척해왔음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 아니되겠읍니다."(1957년 1월 14일 3면)

한국기독공보 지령 400호에 최준(崔埈 新聞評論家-이후 기사에서 중앙대학교 전 교수로 확인됨)이 쓴 '四(사)백호에 부침'의 내용이다. 그는 이 글에서 '프로테스탄트(한국교회)'에 일간 신문이 하나도 없음을 지적하며 '기독공보'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평가했다.

최준은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신문은 세상이 널리아는 바와같이 기독교계의 많은 혜택을 받아 발달되어왔으며 또한 초대 민간지들이 모두 순한글체로 신문을 만들어 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나라 신문계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귀보(기독공보)는 주간신문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씩씩히 가시덤불을 밟고 나오고 있음에 대해 저극히 고마움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그러나 또 한편으로 돌이켜 생각해볼 때 귀보의 사명과 위치가 너무나 우보지지(牛步遲遲)함에 관해서 안타까움을 금치못하는 바입니다. 백반신고를 말하고있는 프로테스탄트가 일간(日刊)신문 하나 갖지 못했다 함은 매우 섬섬하고 또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겠읍니다."

당시 신문평론가로서 발행되고 있는 신문의 현실을 보며 한국교회를 꼬집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최준은 '기독공보' 창간 10주년이 되는 1956년 1월에 4회에 걸쳐 '프로테스탄트와 신문'(원문은 '푸로테스탄트'로 표기)이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했다. 기독교(개신교)에서 언론 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음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1946년 1월 17일 창간호 1면 간행사


그러나 필자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가 이렇다할 신문(일간)을 갖지 못하고 있음에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연재 마지막 원고(1956년 1월 23일자)에서 카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향신문'과 '대구매일신문'을 언급하며, 큰 범위에서 기독교계 언론("신교(新敎)와 구교(舊敎)라는 관념을 떠나서 기독교라는 광범한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기꺼운 현상이라 할 것")이지만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임을 지적한다.

"八·一五(8.15)해방후의 푸로테스탄트는 어떠한가? 물론 푸로테스탄트도 이에 못지않게 신문경영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그 증거로는 현재 비록 주간신문이나마 '기독공보'를 비롯하여 '한국 기독 시보' '기독교보' '국제기독교뉴-쓰' 등 그 수효로는 오히려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주간지로서 소규모로 움직이고 있을 뿐 아니라 교계신문이라는 제약으로부터 비약치못하고 있음은 쓸쓸한 일이다."(1956년 1월 23일자 1면)

그러면서 최준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의 신문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교회는 교인들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대중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속에 파고들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 역할을 신문이 감당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푸로테스탄트의 지도원리가 교인만을 상대로 하는데 있다면 별문제이라 하겠으나 적어도 일반대중의 품속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면 이는 카톨릭에 비하여 확실히 한걸음 뒤떨어졌다고 볼수밖에 없겠다."

프로테스탄트가 신문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뿌리를 최준은 개화기 당시에 발행된 신문에 참여했던 개화기 인사들과 당시 발행된 신문들의 성격에서 찾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와 신문-한국신문사상에 그 선구적 역할'을 시작하는 첫 원고 첫 문장에서 "우리나라의 신문사(新聞史)를 살펴볼 때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新敎)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라고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개화기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다양한 분야에서 역할을 감당했으며, 이들 중에 상당수가 신문과 연관되어있었고,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사는 七○여년의 짧은 역사밖에 아니되나 그중 갑신(甲申)쿠데타를 전후한 十여년의 소위 관보(官報)시대를 거쳐 근대적 민간(民間)신문시대에 들어스자 프로테스탄트는 뚜렸한 주동적 역활을 담당케 되었다"고 주장한 최준은 "근대적 민간신문의 시초인 서재필(徐載弼) 박사 주재의 '독립신문'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신문' '조선그리스도인회보' '협성회회보' '경성신문' 등 일련의 격일간(隔日刊) 내지 주간(週間)신문들이 모조리 프로테스탄트를 배경으로 하여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온갖 서구적(西歐的) 근대문화를 받아드리는데 주동적 역할을 한 프로테스탄트는 이 신문사업에도 자연 주동적인 매개체(媒介體)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최준은 초대사장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서 발행된 '독립신문'에 대해 설명한 후 이후 발행된 신문이 장로교계에서 발행된 '그리스도신문'(언더우드 주재 1897년 4월 1일 창간)과 감리교계에서 발행된 '조선그리스도인회보'(아펜셀러 주재 1897년 2월 2일 창간)라고 꼽으면서 "두 신문은 비록 '독립신문'보다는 한해 뒤져 나왔으나 그 지폭과 편집내용에 있어서는 매우 충실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외에서 배재학당 학생들로 구성된 협성회에서 발행한 '협성회회보'에는 이승만과 유영석이 주필로 참여한 것으로 전했다. 또한 '매일신문', '경성신문'이 발행되었음을 설명하면서 "이상과 같이 당시 온갖 신문은 거의가 기독교인 아니면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인사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또 그 문장에 있어서도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여 오늘의 언문일체(言文一體)의 길을 터놓았으며 더구나 신문제호(題號)로부터 기사본문(記事本文)에 이르기까지 순국문만을 전용했다는 것은 하나의 폭탄적인 혁명이었다. 이것은 오로지 그 공노(功勞)를 기독교에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니 될 것으로 우리나라 문학사상에 커다란 업적이었다."고 전했다. 한편으로 성경이 순국문체를 채용하면서 오랫동안 비하하며 천대를 받았던 한글을 문체로 사용했듯이 당시 발행된 신문 또한 국문만을 사용함으로써 국문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음을 덧붙이며 평가했다.

개신교인이 중심이 되어서 이끌었던 당시 신문의 주요 내용은 독립신문의 발행의 중심인물인 이상재 양홍묵 윤치호 주시경에 의해 개화열과 함께 민권옹호 (民權擁護)와 정치개선(政治改善)이었으며, 계급타파와 탐관오리의 적발 공격, 자주독립의 사상고취 등이다.

최준은 연재 두 번째 원고에서 그리스도신문의 창간사라고 할 수 있는 1면 논설 '지식이란' 제목의 원고(1956년 1월 9일자 1면 재인용)와 '조선그리스도인회보'의 창간호 원고 '조선회보 보라한 뜻을 발명함이라'(1956년 1월 16일자 1면 재인용)라고 할 수 있는 글을 소개하며 특히 기독언론의 방향을 제시했다.

"…조선백성을 위하여 지식은 널리 펴려하는 것이니 지식을 말하려면 다른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와 현상과 법을 아는 것이오 타국백성의 사는 풍속을 아는 것이오 모든 물건만드는 법과 아는 것이라 아무생업이라도 각 익물을 배우는 것이 유익지아님이 없으니 지식이라는 것은 각사람에게 제물로 유익케함이니 나라에도 유익함이 되느니…"(그리스도신문)

"…이뜻은 조선에 있는 교회에서 긴요한 사적과 특이한 소문을 각인에게 전한다는 말이라 이 회보를 칠일동안에 한번씩 출판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지식과 학문을 넓게하노니 슬프다 우리동포 형제들아 동양사적만 좋다 하지말고 선대의 하시던 일만을 올다하지마오. … 우리 회보를 보시면 세계상의 유익한 소문과 각국의 재미있는 사적을 자연히 통달할 것이니 우리가 이 회보를 파는 것은 재리를 취함이 아니오 사람의 호함한 마음을 광명케 함 …"(조선그리스도인회보)

그러나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시대적 전환기를 계기도 당시 발행되던 민간 발행 신문 전체가 폐간되면서 기독교계 두 신문도 발행이 중지됐으며, 이후 '예수교회보'와 앞선 두 신문을 통합한 성격의 '기독신보'가 발행됐지만 편집에서 시사와 정치가 빠졌다. 장로회와 감리회가 연합으로 예수교서회에서 '기독신문', 장로회 종교교육부에서 발행한 '종교신보' 등이 발행되기도 했다.

이같은 프로테스탄트의 신문발행은 해방과 함께 이듬해인 1946년 1월 17일 '기독교공보'('기독공보'에 이어 현재 '한국기독공보'로 제호 변경)가 창간됐다. 한국기독공보의 간행사(창간사)에서 기독언론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基督敎公報(기독교공보)'는 이 새로온 指標(지표)로 向(향)하야 登程(등정)한 朝鮮基督敎會(조선기독교회)의 傳令使(전령사)이다. '公報(공보)'는 朝鮮敎會(조선교회)의 公器(공기)이다. 私(사)를 떠나서 公(공)을, 小(소)를 버리고 大(대)를, 邪(사)를 斥(척)하고 正(정)을, 따를 누르고 하날을 主張(주장)하고 웨치는 萬人(만인)의 것이면서 나(私)의 것이 아닌 公器(공기)이다. '公報(공보)'는 朝鮮敎會(조선교회)의 報道機關紙이(보도기관지)다. 우리 敎會(교회)의 血脈(혈맥)이 되어 上(상)에서 下(하)로, 遠(원)에서 近(근)으로, 西(서)에서 東(동)으로, 京(경)에서 鄕(향)으로, 山(산) 넘고 물 건너 敎會(교회)의 消息(소식)을 詳細(상세)히 삿삿히 너리 알니랴는 傳令使(전령사)이다. ..."(1946년 1월 17일자 1면 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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