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그리고 그 형제들의 비극적 죽음

우당 이회영, 그리고 그 형제들의 비극적 죽음

[ 아름다운세상 ]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4년 02월 21일(금) 09:09

   
▲ 우당 이회영 선생의 6형제들의 초상화. 사진/우당 기념관 제공
경주이씨대동보에 따르면 이회영의 선대는 경주이씨 상서공파로 10대조는 권율 장군의 사위였던 백사 이항복이었다. 이항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데 이어 호조참판과 형조참판, 홍문과대제학을 지내고 호남지방에서 왜적을 막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좌의정 겸 도체찰사를 지냈다. 5대조 오천 이종성은 영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고, 부친 이유승은 1864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해 1868년 평안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성에 이어 예조, 공조, 형조, 이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삼한갑족이라 불리는 가문인 만큼 이외에도 직계 조상 중 이조판서와 영의정과 좌의정,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들이 줄을 잇는다. 이런 가문의 자손인 이회영은 어려서부터 혁명적 소질이 풍부해 사회 통념을 뛰어넘는 과감한 행동을 했는데 예를들어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줬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높임말을 쓰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걸었다. 이런 그의 품성이 결국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여겼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동인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이회영뿐 아니라 형제와 조카들도 만주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희생을 했지만 대부분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1940년 사망한 첫째 이건영의 둘째아들(규면)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 병사했고 셋째 규훈도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귀국해 공군으로 복무하다 한국전쟁때 실종됐다. 가산을 정리할 때 가장 많은 재산을 내놓은 둘째 이석영은 1934년 중국 빈민가를 떠돌다 굶어 죽고 만다. 셋째 이철영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1925년 세상을 떠났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해방을 맞은 다섯째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환멸을 느껴 사임한다. 막내인 이호영도 1933년 독립운동을 하다 온 가족이 북경에서 행방불명 되고 만다. 우당 이회영선생 기념사업회 황원섭 상임이사는 "안타깝게도 독립운동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데 이회영 선생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당 이회영선생 기념사업회는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중ㆍ고등학교 역사교사들을 비롯해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투철한 역사의식과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교육하는 일에 매진해 나가겠다"면서, "이런 교육을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최고의 모델인 우당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삶을 통해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 이회영 선생의 형제들이 망명을 논의하고 있는 상상화. 사진/우당 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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