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벽안의 여인, 서서평 선교사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벽안의 여인, 서서평 선교사

[ 아름다운세상 ] 간호 선교사로 입국해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선교사, 한일장신대 설립 등 큰 기여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4년 06월 03일(화) 10:12

   
▲ 서서평 선교사.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선교의 황금기. 당시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이른바 '1세계 국가들'의 엘리트 젊은이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따라 한번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나라와 민족을 향해 앞다퉈 선교를 떠났다. 당시 외세의 압박 속에서, 개화냐 쇄국이냐의 갈림길에 놓여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채 격랑에 빠져들던 조선반도에도 적지 않은 수의 선교사들이 속속 복음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고 젊음을 바쳤으며, 가족의 희생을 목도한 뒤에도 이를 복음의 씨앗으로 발아시켜 이 땅 구석구석에 뿌렸는지는 이미 우리가 사료를 통해 알고 있다. 여러 선교사들의 이름이 머리를 스치지만 그중 한명, 우리가 그동안 잘 알지 못해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사료에서나 기록을 찾을 수 있던 한 선교사를 소개한다. 1912년, 32살의 나이로 이 땅에 와 1934년 영양실조로 생을 마치기까지 한국인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선교사 서서평(Elisabeth J. Shepping)이 그 주인공이다.

 △보리밥에 된장국을 즐긴 여성 선교사, 가난한 이들 품에서 살다
 독신으로 조선에 온 간호 선교사 서서평은 조선인과 똑같이 살면서 쉬지 않고 사역했던 선교사였다. 그녀의 사역과 삶을 연구하고 있는 한일장신대 임희모 교수는 서서평 선교사를 이렇게 기술한다. "서서평 선교사의 사인이 영양실조였습니다. 가진 재산은 당연히 없었고 시신도 유언에 따라 세브란스 의대에 기증했습니다. 가난했던 조선에서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에 무명치마입고 다니면서 조선인으로 살았던 서서평 선교사가 남긴 복음의 유산은 일일이 기록하기 힘들 만큼 많습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굵은 삶과 사역의 흔적이 있죠."

 선교사로 살던 내내 병고에 시달렸지만 광주 제중원을 중심으로 전라도 전역과 제주도까지 순회하며 환자를 돌보는 등 조선땅 곳곳을 섬기는데 힘썼던 서서평 선교사. 무엇보다 이름도 없던 조선의 여성들을 향한 서서평 선교사의 사랑은 여러 사역들 중에서도 돋보인다. 그녀는 1921년 미국 선교부로 보낸 선교보고에서 비참했던 조선의 여성들을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여성들 중 이름을 가진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돼지 할머니', '큰년이', '개똥 엄마'로 불리고 노예처럼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들 못 낳으면 소박맞고 남편이 외도했는데 도리어 아내가 쫓겨나고 팔려다니는 게 다반사입니다. 이들에게 이름도 지어주고 한글을 가르쳐주는 것이 제게 큰 기쁨을 줍니다"

 여성들에 대한 이런 사랑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 설립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일학교가 바로 현 한일장신대의 모체다. 이뿐인가. 1926년 설립한 조선간호부회는 오늘날의 대한간호협회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로 별세 80주년을 맞은 서서평 선교사의 삶을 교계와 한국사회에 보다 깊숙이 소개하기 위해 '뮤지컬 서서평'을 준비 중인 한일장신대학교 오덕호 총장은 "알면 알수록 서서평 선교사님의 삶은 머리를 숙이게 한다"면서, "학생들과 교수 등 한일장신대 구성원들 모두가 협력해 준비 중인 뮤지컬 서서평을 통해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선인처럼'이 아닌 '조선인'으로 살았던 서서평 선교사, "어머니, 사랑합니다"
 아픔의 땅 조선을 사랑했던 서서평 선교사는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간호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친모를 만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니 몰골이 거지같다. 내 딸이라 하기 부끄러우니 저리가라"며 매몰차게 내쳤다. 비록 친모에게 외면당한 서서평 선교사였지만 그녀는 수양딸 13명과 나환자 아들 1명 등 모두 14명의 한국인을 입양해 기른 '사랑의 어머니'였다. 장성한 딸을 버린 친모와는 달리 서서평 선교사는 입양한 자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고 남편감을 찾으러 다녔다. 보통의 조선 어머니의 삶, 그 이상이었다.

 자신의 편안한 삶을 조선인들에게 나눠줬던 서서평 선교사는 1934년 6월, 영양실조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서서평 선교사가 얼마나 큰 존경을 받았던지 그녀의 장례는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10일 동안 치러졌다. 장례식장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광주시민은 물론이고 특히 그녀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나환자들이 운구행렬을 따르며 외쳤던 말, "어머니~".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백만장자의 위치에서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한 생활에 눈감고 오직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며, 서서평 선교사의 교훈적인 삶을 추모했다.

 담요 반장, 쌀 두 홉과 7전의 재산을 남기고 시신마저 세브란스 의대에 연구용으로 기증한 서서평 선교사. 일생을 조선인과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가난한 이들을 품었던 서서평 선교사는 호남신학대학교 본관 옆 언덕 위 선교사 묘역에 긴 안식의 자리를 마련했다.
 
    <서거 80주년 맞아 서서평 선교사 일대기, 한일장신대가 뮤지컬로 무대에 올린다>

   

   
▲ 한일장신대학교는 뮤지컬 서서평을 무대에 올린다. 대학 전체 구성원들이 이 뮤지컬을 준비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뮤지컬을 연습하던 중 오덕호 총장과 교수,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사진/장창일 차장
'조선의 어머니', '위대한 신앙인',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 같았던 벽안의 선교사'. 서서평 선교사를 일컫는 수식어는 무척 많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 서서평.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일장신대학교(총장:오덕호)가 서 선교사 별세 80주년을 맞아 '뮤지컬 서서평'을 무대에 올린다. 공연은 오는 11월 21~22일 양일 간 전북 전주의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에서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 서서평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한일장신대학교는 실용음악과를 중심으로 대학의 모든 구성원들이 힘을 모으고 있다. 지난 5월 19일 한일장신대를 방문했을 때도 이른 더위로 굵은 땀이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뮤지컬에 출연할 학생들이 교수들의 지도에 따라 맹연습 중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술감독 김상이 교수(실용음악학)는 "작년 12월부터 준비해온 이번 작품에는 학생들과 교수들, 여러 전문가들이 참여한다"면서 "존경받고 닮고 싶은 인물인 서서평 선교사가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모델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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