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

[ 독자투고 ]

정재용 장로
2018년 10월 15일(월) 11:49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양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 말씀은 신명기 28장의 저주를 떠 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18, 19절),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39, 40절)

신명기 말씀대로라면 하박국은 분명히 저주 받은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겠단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사람을 두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히11:38)이라 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사람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자 굴과 풀무 불 속에서도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라고 신앙 고백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재물과 자녀 다 잃고 몸에 병이 들었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 욥,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투옥된 상태에도 하나님을 기억한 요셉, 선교하다가 채찍에 맞고 투옥돼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바울이 그렇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유관순, 길선주, 최봉석,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 주기철, 손양원, 김교신, 이현필 등 많은 신앙 선배들이 고초를 당하거나 그러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할 때 찬송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프거나, 외롭고,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필자는 신앙의 백미는 순교라 생각한다. 지금 북한교회는 순교할 각오로 지하교회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린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할 것이다. 나는 성찬식을 할 때면 가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던 도마를 떠올린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후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나아가신 예수님을(마26:30)을 생각한다.

하박국의 기도문을 보면 무화과, 포도나무, 감람나무, 농작물, 양, 소, 뭐하나 있는 게 없다. 모든 게 '없고, 없다'이다. 그럴지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겠단다. 모든 게 '있고, 있으면서도' 곧잘 하나님 은혜를 잊어버리는 나로서는 할 말을 잃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자'라고 세상이 손가락질 하는 가운데도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하박국의 찬양이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오는듯하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42:11, 43:5).



정재용 장로/성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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