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교수

2020년 04월 07일(화) 08:30

# 현실 앞에서 퇴색돼 가는 사춘기 시절 꿈과 낭만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이름만으로도 복고풍 레트로 향수를 자극한다. 테마파크가 전무했던 시절, 부곡하와이와 함께 수안보 와이키키는 당시 레저문화의 아이콘이었다. 이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사회 변두리 이야기를 남다른 시선으로 이끌어내는 임순례 감독의 작품이다. 개봉 당시의 흥행은 부진했지만, 한국 영화를 끌어갈 작가주의 인생영화로 주목받음으로써 2019년에 재개봉되었다.

성우는 고교시절, 4인조 밴드를 결성하고 평생 음악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졸업 후 세 친구는 생활전선으로 흩어졌고, 성우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란 이름으로 밴드를 이끌어간다. 경기 악화로 해지 통보를 받은 성우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그곳, 고향 수안보로 내려온다. 재회한 친구들은 약사(민수), 환경단체 직원(인기), 시청 말단직원(수철)이 되었고, 학창시절 마음속 연인 인희는 남편을 잃고 야채 트럭을 몰며 힘겹게 살아간다. 성우는 수안보호텔에서 일하게 되지만 그것 역시 녹록지가 않다. 밴드 멤버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들이다. 강수는 의리는 있으나 도박과 약에 손을 대고, 정석은 감각은 있으나 바람기 때문에 둘은 연적(戀敵)이 되었다. 그럼에도 "음악만 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성우는 우직함과 성실함으로 밴드를 이어간다.

이 영화는 사춘기 시절의 꿈과 낭만이 냉혹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퇴색되는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밴드 이름을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정한 것은, 탐스런 야자수와 화려한 요트처럼 찬란한 미래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살수록 점점 눅눅해지고 구차한 민낯을 드러낸다. 약사인 민수는 성공만 추구하고, 공무원인 수철과 환경운동가 인기는 자기 신념만 고집하면서 우정에 금이 간다. 결국 고통사고로 비명횡사한 수철과 뿔뿔이 흩어진 멤버들을 뒤로 하고 성우는 혼자서 출장 연주자로 나선다. 음악은 고상한 꿈이 아닌 최후 생계수단이 되면서 감당키 어려운 수모를 겪는다. 활로를 찾아 내려간 여수에서 새 희망을 피우며, 인희가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르고 성우는 뒤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 위기의 시대, 타협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Art is Long, Life is Short)는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이 생각난다. '예술'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영원한 가치라면 인생은 눈앞에 놓여진 현실을 의미한다. 짧고 덧없는 인생에 연연하기보다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 열망이 사람들 가슴속에 들어있다. 어떤 이는 음악과 미술, 어떤 이는 정치와 경제, 어떤 이는 운동과 스포츠가 그의 예술이다. 성우에게 예술은 음악이요 '와이키키'이다. 누구나 한때는 자신 속 '와이키키'(Waikiki) 때문에 눈빛이 빛나고 가슴이 용광로처럼 불타오른다. 그 '와이키키'를 향해 달려가는 순간이 그 사람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된다.

어찌 보면 삶은 '비신화화'의 과정인지 모른다. 신화를 품고 인생을 시작하지만 생각보다 누추하고 구차한 것이 인생이다. 자기 능력 또한 생각보단 대단치 않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인생인 것이다. 현실은 사람을 겸비케 만든다. 자신이 꿈꾸던 것을 손에 넣는 순간, 아우라가 빛을 잃고 마는 것 또한 비극이요 역설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자의 한탄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영화의 주인공, 성우의 위대성은 그의 음악적 재능보다는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고래 힘줄 같은 인내와 끈기일 것이다.

오늘의 영성교사는 타협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길을 가는 성우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 이러한 구도자의 전형이 성경 속에 나타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부르심의 푯대를 향해 끝까지 달려가는 것, 이것이 영성교사의 삶이다. 그 경주의 끝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믿음의 선조들이 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우가 음악인의 삶을 '여수'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en Christo)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부름받는다.

코로나19로 모두가 불안한 이 시대는,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부르심의 푯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영성교사를 필요로 한다. 이들은 세상이 "평안하다" 할 때 경성할 수 있고, "화로다" 할 때 평안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처럼, 코로나 속에서도 예수님 안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영성교사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교사상일 것이다.

이규민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