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온 호주 여선교사들

부산에 온 호주 여선교사들

[ 선교여성과교회 ] 경남지역 여전도회 3

탁지일 교수
2024년 03월 21일(목) 00:05
조선에서 처음 사역했던 호주 여선교사는 헨리 데이비스의 누이 매리 데이비스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부산지역 선교를 담당했던 여선교사들은 여선교연합회의 파송을 받아 부산에 온 매리 퍼셋(Mary Fawcett, 1862-1938), 진 페리(Jean Perry, 1863-1935), 벨 멘지스(Belle Menzies, 1856-1935)였다.

데이비스가 사망한 후 두 번째 호주선교사들이 1891년 10월 12일 부산에 도착한다. 위에 언급한 세 명의 여선교사들과 제임스 맥케이(James Mackay, 1857-1919) 그리고 그의 부인인 새라 맥케이(Sara Mackay, 1860-1892) 등 모두 다섯 명이었다.

여선교사들의 비율이 높은 것을 고려하면, 이들의 선교가 여성들에게 초점이 맞춰졌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여선교사들 헌신은 부산지역 복음, 교육, 의료 선교의 기초가 되었다.

새라 맥케이는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지원했으며, 조선에 오기 전 간호훈련과정도 마쳤다. 하지만 부산에 도착한 후 병을 얻었고, 이듬해인 1892년 1월 27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29일 부산 복병산 헨리 데이비스 곁에 잠들었다. 새라 맥케이는 짧은 시간 부산에 머물렀지만, 좋은 품성을 지냈으며, 음악적인 재능도 뛰어났고, 병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선교사였다.

매리 퍼셋은 자신이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였던 제임스 맥케이의 권고를 받고 조선선교사에 지원했다. 선교사역을 감당하던 매리 퍼셋은 새라 맥케이 사망 후 1892년 10월 11일 제임스 맥케이와 결혼한다. 하지만 건강 악화로 인해 1893년 9월 호주로 돌아갔다.

진 페리는 추진력과 열정을 겸비한 선교사였다. 한국어 습득도 빨랐으며, 선교사역을 진행하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도 했다. 후일 부산진일신여학교로 발전한 고아원을 설립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1895년 9월 여선교연합회 임원회에 사임을 요청했고, 이후 서울에서 빈곤층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을 설립하는 등의 초교파적인 사역을 지속했다. 최근 특수교육선교사로서의 진 페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그녀의 삶과 사역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알려졌다.

벨 멘지스는 선교사들의 어머니라고 여겨질 정도로 부드러운 인품과 겸손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최초의 여선교사들 중에서 은퇴 때까지 33년을 부산에서 사역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벨 멘지스의 전도를 받아 1894년 4월 22일 부산지역 첫 수세자가 된 심상현을 시작으로 수많은 믿음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 특히 한강 이남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인 부산진일신여학교로 발전한 미우라고아원(Myoora Istitute)을 설립했다.

이들 호주 여선교사들은, 남성선교사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부산의 차별받는 여성들과 버림받은 소녀들을 위한 복음전도와 교육에 효과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다.

# 선교 초기 조선의 여성들

선교 초기 조선 여성들의 형편에 대해, 1894년 1월부터 1897년 3월 사이에 네 번에 걸쳐 조선을 방문한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은 '결혼 풍습'에 대한 관찰을 통해 서양여성의 눈에 비친 조선 여성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자는 결혼으로써 운명이 명백히 결정된다. 7세부터 아버지의 견고한 굴레에 갇혀 살아오던 소녀는 17세가 되면 시대의 엄한 담장 속에 갇혀 살게 된다. 그것이 '관습'이다. 젊은 남녀가 배필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결혼은 아버지에 의해 결정되며 당사자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조선의 여성은 속박 속에서 살아왔다. 그들은 열등함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결혼할 때 애정을 기대하지 않으며, 관습을 깨뜨린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말 없이 '현모양처'의 법칙을 따른다. 고분고분하지 못하다든지 화를 내거나 추문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는 모진 매를 맞게 되고 상민의 여자로 전락한다. 가정에서의 여자의 은둔은 결혼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며, 중상류층의 가정일 경우 그 정도는 극심하다. 조선의 여인은 어머니가 되면 지위가 좀 나아진다. 여아의 출생은 그렇지 못하지만, 첫아들을 낳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다. 아들에게 이름이 지어 주면 여자는 아무개 엄마로 불린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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