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선교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

군선교 위해 준비하시는 하나님

[ 라떼는 말이야! ] 전 합참의장 이필섭 장로 ①

이필섭 장로
2024년 04월 03일(수) 13:26
필자는 일제말기에 충남 당진의 가난한 농가에서 8남매의 여덟째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전통적으로 철저한 유교 집안이었다.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 아무도 예수님의 이름을 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교회에 가보자고 권유하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 가난한 집안 사정과 전쟁 직후 젊은이들의 군인이 되고자 하는 분위기가 어우러져서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시골 농촌에 새로 세워진 농업고등학교 졸업 후 2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사관학교에 합격한 것을 두고 주변에서는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필자를 군선교에 쓰시고자 계획하셨던 것 같다.

사관학교의 기초훈련은 혹독 했다. 하지만 학창 시절 12년을 매일 같이 4킬로미터를 도보로 통학했고, 하교 후에는 항상 집안일을 도와야 했기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미 단련돼 있었다.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힘든 훈련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해 주셨다는 사실을 하나님을 믿고서야 깨닫게 됐다.

사관학교 생활 중 같은 중대의 잘 믿는 동기생을 만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매일 동기를 따라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했고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새벽기도를 포함해 모든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석했다. 졸업전에는 세례도 받았다. 짧은 사관학교 생활 동안의 신앙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를 믿으면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을 본분으로 하는 군인이 된 것에 긍지와 자랑, 보람을 갖게 되었다.

그 후 필자는 최전방 비무장 지대의 GP근무에서부터 월남의 정글전을 포함해 30여 개의 직책을 수행했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일할 수 있었다. 전쟁을 예방하고, 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 군대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서 군대는 강해야 되고 그런 강한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을 잘 갖추어야 하고, 그중 가장 중요한 첫 요소인 도(道)는 생사를 같이 할 수 있을 만큼 위아래가 하나로 뭉쳐져야 한다고 손자병법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군대가 되기 위해서 지휘관은 부대원들을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처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결국 핵심은 ‘사랑’이다.

군대에서는 부대원들이 끊임없이 새로이 전입해 오고 또 전출해 나간다. 그런 가운데서 필자는 새로운 부대원을 만날 때마다 '너는 처음 만나는 이 부대원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했다. 이런 자기 훈련은 부대원을 대할 때 사랑의 감정으로 만날 수 있도록 유도해 주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함으로써 즐겁고 행복한 군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 이는 어떤 조직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원리이고,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소령 진급 후 육군대학에서 5년간 근무했다. 그곳은 교회를 중심으로 학생들과 모든 교직원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이었다. 담임인 김홍태 군종목사님은 '주일성수, 새벽기도, 2명 이상 전도, 온전한 십일조, 매일 성경 읽기' 등 성도의 5대 실천사항을 강조했다. 새벽기도 시간에는 출석을 불렀고, 결석자를 만나면 안부를 묻곤 했다. 목사님의 열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필자도 교회학교 부장을 맡았고, 당시 군종병이던 정성진 목사님(거룩한빛광성교회 은퇴)을 만나 동역하면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대령으로 진급했고, 1979년 8월에는 전방 연대장으로 보직 명령도 받았다. 하지만 북한의 무장간첩이 끊임없이 침투하던 때여서 전방에 보직되는 지휘관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다. 이 문제로 목사님과 상담했다. 기도원에 가서 3일간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몇 가지 개인적으로 구상한 것이 있었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추천해 주신 오산리 국제금식기도원으로 찾아갔다. 3일 후면 용사들과 함께 훈련을 해야 하는데 3일 동안을 금식한다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순종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를 기도 주제로 삼고 기도굴에 들어가 3일간 금식기도를 드렸다. 이제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고 맡겼으니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최선을 다하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필자가 부임한 연대는 경기도 일산 앞 한강 변, 지금의 자유로 지역이었다. 한강 하구는 남과 북의 경계선이어서 북한 영토에서 한강물이 역류할 때 강에 뛰어들면 큰 힘 들이지 않고 서울 가까이로 침투할 수 있는 곳이었다. 1980년 3월 23일 오전 4시 25분, 적 무장간첩 3명이 우리 연대가 담당하고 있는 일산 앞 한강 변으로 역류하는 한강 물을 타고 침투했다. 그날은 주일이었다. 달이 없는 깜깜한 밤이었으므로 침투하는 적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잘 훈련된 특수부대의 무장간첩들은 이상하게도 장애물이 설치되지도 않은 초소 사이의 중간 지역으로 침투할 수 있었음에도 우리 경계병의 호 정면으로 서슴없이 침투해 왔다. 우리 경계병들은 방아쇠만 당기면 총탄이 나갈 수 있도록 완전히 준비했기에 승패는 이미 결정된 싸움이었다. 비록 우리 측은 초년병들이었지만, 털끝 하나 다지치 않고 적 특수부대 요원 3명을 일망타진했다. 필자가 육군대학에서 5년간이나 전술을 배우고 가르쳤지만, 그 상황에서 작전이 그렇게 종결될 수 있었던 원인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는 부족한 필자의 기도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김범규, 황중해 용사들의 믿음과 담대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의 성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셨기 때문임을 알고 필자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그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낡은 연대 예배당을 콘크리트 영구 건물로 재건축해 하나님께 봉헌했다.

필자는 지금도 가끔 자유로, 그 장소에 세워져 있는 '무장간첩 완전 섬멸 기념'이란 큰 돌비석을 지난다. 그때를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셨음에 깊은 영광을 돌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한다. 그 후로는 복잡한 상황이 예상되면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고,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께 늘 감사드렸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한 승리의 군대가 되기 위해 신앙은 필수임을 강조하곤 했다.

 이필섭 장로 / 전 합참의장(예)육군 대장)·국군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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