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아닌 농부의 바람

농부 아닌 농부의 바람

[ 독자투고 ]

이봉호 목사
2024년 04월 03일(수) 15:20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일 게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농부들의 일손은 조금 더 바빠질 듯하다. 일 년 농사 대풍을 위해 일기와 날씨 그리고 농부의 손놀림은 필수다. 산에서는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 등 꽃들이 길 가는 행인들을 유혹하고 아름다움을 주기도 하겠으나, 농부는 그곳에 깊이 빠질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와 어머니는 봄부터, 가을 수확까지 밭과 논을 삶의 터전 삼고 일생을 농사일에 전념하신 것을 또렷이 기억한다. 때론 농사일 때문에 부모님은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고, 때론 서로를 필요로 했기에 흙손으로 떠받치며 억척스럽게 살아 오셨다. 오늘따라 우리 부모님 생각이 많이도 난다. 아버지는 지금 나의 나이만큼도 살지 못할 만큼 몸을 돌보지 않으시고 말 그대로 성실과 부지런을 자본 삼아 수고의 땀, 희생과 헌신의 땀을 흘리다 가신 분이다. 왜 그렇게 앞만 보고 살아 오셨을까? 천성적인 스타일일 수 있겠으나, 7남매를 둔 가장으로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식들을 제대로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흙과 삽, 괭이를 들고 이곳저곳 파고 일궈야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밤부터 내린 비가 참 좋고 은근히 반기기도 했다. 며칠 전부터 지난 겨울 꽁꽁 언 땅을 삽과 괭이로 두루 파서 돌을 주워내고 부산물들을 골라냈다. 그런 가운데, 흙을 콩고물 만지듯 매만지고, 그 위에 퇴비와 거름, 비료, 가루 살충제 등을 뿌린 후 다시 흙과 잘 섞었다. 나름 멋진 밭이랑을 만들어 놓았기에 봄비가 내리면 비에 푹 젖게 될 것이고, 일궈놓은 고랑도 빗물을 머금고 있을 터이니 모종을 심기에는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에 비를 기다렸다는 말이다.

자갈밭 같은 굳은 땅을 연장으로 파고 갈아엎을 때면 너무너무 힘들어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하며, 거친 숨을 쉬어 가며 파고 팠다. 그랬더니 힘은 들어도 땀 흘릴 수 있음에 나름의 보람도 느꼈다. 뿐인감, 누가 그렇게 묻어놓고 숨겨 놓았는지, 크고 작은 돌들이 눈에 거슬리기에 하나 둘 골라내고 주워 내는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내가 기다리는 비가 제법 많이 내려 줬고,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판단하여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비옷을 입은 후, 농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막상 일을 하려고 하니, 전문 농사꾼이 아닌 터라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릴 적 기억을 되살리고, 아내와 몇 년 동안 어설픈 농사를 지어본 것을 떠올리며, 오늘은 나 혼자 비닐을 덮는 일명 '비닐 멀칭' 작업을 하게 됐다. 매년 비닐 멀칭을 하고 그 위에 모종을 사다 심고 그 식물이 자라는 과정이 기억난다. 이 과정에서 장마철을 맞게 되면 빗물이 잘 빠지지 않아, 빗물이 비닐 온상 위로 올라온다. 이 괴이한 현상과 이랑 사이 물들이 많이 쌓여 제대로 다닐 수도 없고, 농작물이 잘 자랄 수도 없다. 그래서 올해는 중간 중간 배수로를 만들어 놓고, 물 빠짐이 좋도록 고랑도 잘 파 놓았다.

운전을 하다 농장이나 밭들을 보면 아직도 비닐을 입혀 놓은 것을 많이 볼 수는 없었다. 나 역시 작년에 비하면 조금 빨리 해 놓은 편이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봄은 돌아 왔기에, 부지런을 떨어 본 나의 손놀림에 비닐 멀칭 작업까지 끝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좋다. 문제는, 그곳에 작물을 선택하여 모종을 사다 심는 것이다. 아직도 꽃샘추위와 아침저녁의 기온차로 인해 내가 심을 모종을 사다 심는 것은 이른 것 같다. 준비된 자는 마음에 여유로움이 생긴다는 말처럼 나는 맘이 가볍다. 날만 지나가면 모종을 구해 심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올해는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고추, 오이, 토마토를 위시하여 작년에 재미를 봤던 복수박도 몇 포기 사다 심어볼 생각이다. 뿐임감, 그래도 손길이 많이 가지 않는 땅콩과 고구마 줄기도 사다 심을 생각이다. 특히 고구마는 간식거리가 흔하지 않은 그 시절이 떠올라 더 관심이 간다. 늦가을과 겨울에 친구들과 어울려 자기들 집에 지어놓은 고구마를 부모님 몰래 훔쳐다가 가까운 산으로 올라가 작은 굴을 파서 구워먹던 동심이 떠오른다.

농사일에 나는 전문가도 아니다. 그리고 오래 지어본 것도 아니지만 재미가 있다. 밭에 가면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곳에 있으니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화롭다. 그래서 이런 자연과 농장을 즐겨 찾게 된다. 올해는 하늘의 공기와 햇빛 그리고 적당량의 비를 기다리며 작은 농부로서의 삶을 통해 인생의 또 다른 재미를 느껴 볼까 한다. 인생은 흙으로 왔으니 흙을 만지고 흙에서 생활하니 삶이 재미고 때론 행복감도 든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는데,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 있다. 난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 농사일도, 인생살이도, 목사로 부름 받은 목회일도 기쁘고 즐겁게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 목사로 살다가 가고 싶다.

이봉호 목사 / 새구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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