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시대를위한미래담론 ] (4)노령화 시대와 기술
손화철 교수
2024년 05월 08일(수) 00:13
|
#세 가지 현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통계를 보면 2024년 3월 기준 65세 이상의 국민은 총 987만 3344명으로 총인구의 19.2%이다. 국제연합(UN)의 기준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고령자(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로 구분된다고 하니, 우리나라는 사실상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65세인 사람들은 1959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 소득은 81달러로 2023년의 400분의 1 수준이다. 소득이 400배로 늘어난 기간은 동시에 엄청난 기술 발전이 일어난 때였다. 전쟁 후 전국이 사실상 초토화되어 기술이라 할 만한 것이 없던 상태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첨단 기술을 여럿 가지게 되기까지 일어난 변화를 물질적인 풍요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 기술발전의 열매가 정의롭고 공평하게 분배되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모든 이의 삶의 조건과 맥락이 바뀌었다. 사람이 사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의 목록이 늘어났고, 알아야 할 것도 많아졌다. 전에는 단순한 수준의 의식주가 중요했다면, 기술이 발전하면서 수도 전기 금융 인터넷 교통 등이 삶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오늘날의 노인은 그 엄청난 변화를 이루어낸 장본인이면서 그에 따른 혜택도 누렸지만, 동시에 빠른 기술 변화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198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가 도입되었을 때 컴퓨터 학원에서 워드프로그램을 배워야 했던 중년의 직장인이 이제는 음식 주문 자동 기계인 키오스크 앞에서 당혹해하는 노인이 되었다. 이들의 경험은 기술이 주는 편리함과 동시에 기술발전으로 인한 변화에 박자를 맞추며 사는 어려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런데 노년층이 기술로 인해 얻는 혜택과 어려움은 그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그에 따른 필요가 생기는 동시에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순발력이 떨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사실, 즉 △노령인구의 증가 △빠른 속도의 기술발전 △노인의 적응력 둔화를 부정하거나 그 문제의 심각성, 혹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현실에 대한 여러 가지 대안들이 활발하게 나오고 있다. 출산율 제고를 위한 범정부적 노력이 이루어지고, 기술 발전으로 인한 부작용을 해소하면서 경쟁에서도 이기기 위한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노인들에게 인터넷, 스마트폰, 키오스크 사용 방법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들도 여기저기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런 파편적인 접근은 노령화 사회와 현대기술의 연결이 내포하는 다양한 함의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기술과 삶의 질
우선 기술 발달과 노령화 자체의 상호작용을 생각해 보자. 사람의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은 경제 발전의 일반적인 영향이기도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의료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 발전의 과정에서 치료의 결과에 대한 평가가 더 정교해졌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는 무조건 더 살기 위해 노력했다면, 오늘날에는 치료 과정이나 치료 이후의 삶의 질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따라 최근 연명의료결정 제도를 통해 임종이 가까웠을 때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들은 치료의 가능성이 없다면 연명의료를 통해 생명만 유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기술로 인해 수명의 연장이 가능해졌는데, 그렇게 늘어난 삶의 어떤 순간에 그 가능성을 포기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뻗어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사람을 어떻게든 살려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의료행위가 생명의 본질과 삶의 의미와 같은 신학적·철학적 성찰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의료기술의 발전 방향이 병을 정복하고 죽음을 물리치는 것에 집중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지나게 될 삶의 마지막 시간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고통을 조절하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기술도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조금 확장하면 새로운 기술은 무조건 선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에는 그런 생각이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신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새로움의 내용이 무엇인지, 특히 그것이 특정 사용자나 사회 전체에 어떤 유익과 손해를 끼치는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관련 규제도 만들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기술 개발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기업이나 개발자가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술 개발의 숨은 전제
최근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는 노령층을 위한 기술, 이른바 '실버 테크놀로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부분이 있다. 실버 테크놀로지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말벗 역할을 하는 AI 로봇 같은 것인데, 이들은 노인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복약이나 식사 시간 알림 같은 기능이나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긴급한 상황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다. 아직 널리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외부와의 소통이 줄어든 노인들의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 치매나 우울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논의와 기술의 개발이 노령인구를 기술의 소비자가 아닌 시혜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말벗을 할 사람이 없으니 AI 로봇과 대화를 나누어 우울증과 치매를 극복하라는 대책은 참으로 우울한 대책이다. 물론 아무도 없이 홀로 있는 것보다 낫겠으나, 그 '아무'가 사람이 아닌 로봇이면 된다는 방책이 과연 만족스러운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와 진입하고 있는데, 인구의 20%가 그런 식으로 돌봄의 대상이 되는 상황도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무지하고 불쌍하며 힘없고 외롭다는 전제를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없다. 그 전제가 과연 현실을 반영하는지, 또 그것이 현실이라면 과연 바람직한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노령인구가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방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돕기 위한 기술이 개발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지속가능한 기술 개발
실버 테크놀로지가 보이는 부적절한 경향성은 사실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술사회의 특징이다.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사회적 문제로 보고, 그들을 돌봄의 대상인 '약자'로 취급하는 것 역시 큰 틀에서는 기술 발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거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는 나이가 많아 실질적인 경험치를 쌓은 노인이 매우 중요했다. 노인은 단순히 나이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경험이 그 사회에서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첨단 기술의 세상에서는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과거의 지식은 무의미하고, 그보다 새 기술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런 환경에서 노인은 천대받기 일쑤이고, 돌봄과 가르침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태도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노인에게 각종 신기술을 가르치려는 시도는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는 나름의 노력인 것이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은 과연 오늘날과 같은 방식이 기술 발전이 지속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지속가능한 발전 혹은 지속가능한 성장은 흔히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환경적, 사회적 손실이 지나치게 발생하여 발전과 성장을 오히려 저해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기술 개발의 방식와 방향을 적절하게 조절해서 발전과 성장이 지속하게 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인간적 요소를 더하여 확장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기술의 발전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 발전에 적응할 수 있는 속도와 강도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사람마다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상대적으로 적응력이 떨어지는 노령인구가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변화의 속도와 정도도 일정하게 낮아질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기술경쟁의 측면만을 강조해서 급격한 변화를 서슴치 않는 것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초고령 기술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의 길을 걷고 있다면 교회의 현실은 더욱 열악하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성도들은 이미 중년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다. 교인의 고령화는 그 자체로 문제이겠으나, 앞에서 지적한 여러 문제의 측면에서 보면 교회는 기술사회를 향해 대안을 제출할 매우 좋은 자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강고하게 조직되었을 뿐 아니라 지적 능력과 헌신의 자세를 가진 노령 인구를 보유한 특별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노인의 삶의 질이 어떤 방식으로 보장되어야 하고 죽음의 과정이 어떻게 해야 가장 은혜로울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 기술이 어떻게 개발·사용될 수 있는지 제안할 수 있다. 또 노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 폄하를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고 노령인구가 좀 더 적극적인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나아가 초고령 사회를 맞이한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모색할 사명도 감당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기술의 문제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새로운 사역의 장이 열릴 것이다.
손화철 교수 / 한동대학교 교양학부·철학 담당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통계를 보면 2024년 3월 기준 65세 이상의 국민은 총 987만 3344명으로 총인구의 19.2%이다. 국제연합(UN)의 기준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고령자(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로 구분된다고 하니, 우리나라는 사실상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65세인 사람들은 1959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 소득은 81달러로 2023년의 400분의 1 수준이다. 소득이 400배로 늘어난 기간은 동시에 엄청난 기술 발전이 일어난 때였다. 전쟁 후 전국이 사실상 초토화되어 기술이라 할 만한 것이 없던 상태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첨단 기술을 여럿 가지게 되기까지 일어난 변화를 물질적인 풍요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 기술발전의 열매가 정의롭고 공평하게 분배되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모든 이의 삶의 조건과 맥락이 바뀌었다. 사람이 사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의 목록이 늘어났고, 알아야 할 것도 많아졌다. 전에는 단순한 수준의 의식주가 중요했다면, 기술이 발전하면서 수도 전기 금융 인터넷 교통 등이 삶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오늘날의 노인은 그 엄청난 변화를 이루어낸 장본인이면서 그에 따른 혜택도 누렸지만, 동시에 빠른 기술 변화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198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가 도입되었을 때 컴퓨터 학원에서 워드프로그램을 배워야 했던 중년의 직장인이 이제는 음식 주문 자동 기계인 키오스크 앞에서 당혹해하는 노인이 되었다. 이들의 경험은 기술이 주는 편리함과 동시에 기술발전으로 인한 변화에 박자를 맞추며 사는 어려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런데 노년층이 기술로 인해 얻는 혜택과 어려움은 그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그에 따른 필요가 생기는 동시에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순발력이 떨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사실, 즉 △노령인구의 증가 △빠른 속도의 기술발전 △노인의 적응력 둔화를 부정하거나 그 문제의 심각성, 혹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현실에 대한 여러 가지 대안들이 활발하게 나오고 있다. 출산율 제고를 위한 범정부적 노력이 이루어지고, 기술 발전으로 인한 부작용을 해소하면서 경쟁에서도 이기기 위한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노인들에게 인터넷, 스마트폰, 키오스크 사용 방법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들도 여기저기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런 파편적인 접근은 노령화 사회와 현대기술의 연결이 내포하는 다양한 함의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기술과 삶의 질
우선 기술 발달과 노령화 자체의 상호작용을 생각해 보자. 사람의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은 경제 발전의 일반적인 영향이기도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의료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 발전의 과정에서 치료의 결과에 대한 평가가 더 정교해졌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는 무조건 더 살기 위해 노력했다면, 오늘날에는 치료 과정이나 치료 이후의 삶의 질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따라 최근 연명의료결정 제도를 통해 임종이 가까웠을 때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들은 치료의 가능성이 없다면 연명의료를 통해 생명만 유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기술로 인해 수명의 연장이 가능해졌는데, 그렇게 늘어난 삶의 어떤 순간에 그 가능성을 포기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뻗어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사람을 어떻게든 살려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의료행위가 생명의 본질과 삶의 의미와 같은 신학적·철학적 성찰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의료기술의 발전 방향이 병을 정복하고 죽음을 물리치는 것에 집중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지나게 될 삶의 마지막 시간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고통을 조절하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기술도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조금 확장하면 새로운 기술은 무조건 선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에는 그런 생각이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신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새로움의 내용이 무엇인지, 특히 그것이 특정 사용자나 사회 전체에 어떤 유익과 손해를 끼치는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관련 규제도 만들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기술 개발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기업이나 개발자가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술 개발의 숨은 전제
최근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는 노령층을 위한 기술, 이른바 '실버 테크놀로지'에 대해서도 고민할 부분이 있다. 실버 테크놀로지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말벗 역할을 하는 AI 로봇 같은 것인데, 이들은 노인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복약이나 식사 시간 알림 같은 기능이나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긴급한 상황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다. 아직 널리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외부와의 소통이 줄어든 노인들의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 치매나 우울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논의와 기술의 개발이 노령인구를 기술의 소비자가 아닌 시혜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말벗을 할 사람이 없으니 AI 로봇과 대화를 나누어 우울증과 치매를 극복하라는 대책은 참으로 우울한 대책이다. 물론 아무도 없이 홀로 있는 것보다 낫겠으나, 그 '아무'가 사람이 아닌 로봇이면 된다는 방책이 과연 만족스러운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와 진입하고 있는데, 인구의 20%가 그런 식으로 돌봄의 대상이 되는 상황도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무지하고 불쌍하며 힘없고 외롭다는 전제를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없다. 그 전제가 과연 현실을 반영하는지, 또 그것이 현실이라면 과연 바람직한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노령인구가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방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돕기 위한 기술이 개발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지속가능한 기술 개발
실버 테크놀로지가 보이는 부적절한 경향성은 사실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술사회의 특징이다.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것을 사회적 문제로 보고, 그들을 돌봄의 대상인 '약자'로 취급하는 것 역시 큰 틀에서는 기술 발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거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는 나이가 많아 실질적인 경험치를 쌓은 노인이 매우 중요했다. 노인은 단순히 나이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경험이 그 사회에서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첨단 기술의 세상에서는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과거의 지식은 무의미하고, 그보다 새 기술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런 환경에서 노인은 천대받기 일쑤이고, 돌봄과 가르침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태도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노인에게 각종 신기술을 가르치려는 시도는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는 나름의 노력인 것이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은 과연 오늘날과 같은 방식이 기술 발전이 지속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지속가능한 발전 혹은 지속가능한 성장은 흔히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환경적, 사회적 손실이 지나치게 발생하여 발전과 성장을 오히려 저해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기술 개발의 방식와 방향을 적절하게 조절해서 발전과 성장이 지속하게 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인간적 요소를 더하여 확장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기술의 발전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 발전에 적응할 수 있는 속도와 강도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사람마다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상대적으로 적응력이 떨어지는 노령인구가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변화의 속도와 정도도 일정하게 낮아질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기술경쟁의 측면만을 강조해서 급격한 변화를 서슴치 않는 것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초고령 기술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의 길을 걷고 있다면 교회의 현실은 더욱 열악하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성도들은 이미 중년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다. 교인의 고령화는 그 자체로 문제이겠으나, 앞에서 지적한 여러 문제의 측면에서 보면 교회는 기술사회를 향해 대안을 제출할 매우 좋은 자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강고하게 조직되었을 뿐 아니라 지적 능력과 헌신의 자세를 가진 노령 인구를 보유한 특별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노인의 삶의 질이 어떤 방식으로 보장되어야 하고 죽음의 과정이 어떻게 해야 가장 은혜로울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 기술이 어떻게 개발·사용될 수 있는지 제안할 수 있다. 또 노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 폄하를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고 노령인구가 좀 더 적극적인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나아가 초고령 사회를 맞이한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모색할 사명도 감당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기술의 문제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새로운 사역의 장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