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시선으로 내가 먼저 그들의 손을 잡아보라

주님의 시선으로 내가 먼저 그들의 손을 잡아보라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누가복음 <6>

왕인성 교수
2021년 05월 18일(화) 10:16
9:1~6과 10:1~16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주셨던 지침을 통해, 우리가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원칙을 제공한다. 예수님의 선교지침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대, 배낭, 여벌 옷, 신발 등을 지참하지 말도록 명하심으로 선교여행 준비의 단순화를 말씀하신다(9:3).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면서(9:58), '생명을 전하는 일이 우선이고, 안락은 차선임'을 말씀하신다. 둘째로, 예수님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는 독특한 명령을 내리신다(10:4). 근동지역에서는 지인을 만나도 오래 안부를 나누는 관행이 있었다 한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사람들과의 관계 단절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선교의 우선순위와 시급성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주변적인 것, 내 안전과 안락에 집중하느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명에서 시선을 떼는 경향이 있다. 나의 십자가의 길은 하늘에 닿도록 선명한가?(9:23) 아니면 잡초로 길이 없어진 상태는 아닌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며, 너무 많은 것을 취하느라 이곳저곳 구멍 난 우리의 사람 낚는 그물을 깁고, 우리의 삶을 단순화하는 것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다(9:62).

9~10장의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는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헤롯은 예수님의 사역과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이 누군가?' 궁금해 했고(9:9),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내게 대해 누구라고 하며,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셨다(9:18~20). 문학기법 중에는 인클루지오(inclusio)가 있다. 주제를 앞뒤로 배치하고 가운데 핵심을 담는 기법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헤롯과 예수님의 질문 사이에, 누가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배치한다. 이 기적은 우선적으로 우리가 가진 것이 적을지라도,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을 위한 자원을 능히 제공하실 분임을 알리는 목적이 있지만, 또한 우리의 일상적 필요를 채우시고, 장차 신랑 되셔서 종말적 잔치를 베푸실 분이심을 예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메시아로만 인식되는 것을 거부하신다. 베드로의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고백이 나오자마자, 주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 부활하실 것을 재차 말씀하신다(9:22, 44).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묻기도 두려워하였는데(9:45), 본인들이 예상과는 다른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불편한 말씀은 거부하고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제자들의 모습이 표출되는데,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안중에도 없이,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이 일어났고(9:46),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지역에 불을 내려 심판하라고 요구할 만큼의 파괴적인 배타성이 드러난다(9:54). 유대인들은 여러 차례 예수님을 거부했음에도,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에게 한 번도 불을 내려 멸망시키라는 요구를 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은혜를 갚을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를 영접하고 섬기는 일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임에도 (9:47~48),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는 율법사의 질문 마냥 우리는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존재만을 이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제자들도 바리새인들/율법사와 마찬가지로 사마리아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10:25~37)를 통해 당시 유대인에게는 절대 이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돕는 장면을 보여주신다. 내가 도우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이가 나의 도움으로 인해 크게 놀라 감동한 적은 없는가? 없다면 내가 이제 그러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내 도움이 합당한 지를 따지기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의 손을 먼저 잡는 이웃이 되는 것, 이것이 주님의 명이다(10:37).

이 비유 이전에도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세상을 보여주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지 않고,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높여 상석을 좋아하였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 모든 오만한 생각을 일격에 무너뜨린다. 하늘의 식사가 제공되는 빈들에는 남자만 5000명 되는 인원이 정결의식을 위해 손을 씻을 물이 없었으나, 하늘의 은혜가 임했고, 떡을 받기 위해 50명씩 모여 앉는 자리에는 상석이 없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신분, 재산, 국적, 성별을 차별함 없이 함께 하늘의 음식을 나눠 먹었다. 하늘의 생명의 떡을 받아드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일 뿐 감히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제 자기를 부인하는 내 십자가의 사명이 희미해지지 않았는지를 살피며, 삶을 단순하게 사는 길을 고민하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손해와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기로 했던 우리의 결단을 다시 떠올리자. 내 이익을 고수하며, 내 편을 만들기보다는 주님의 시선으로 그들의 손을 내가 먼저 잡아보자.

왕인성 교수 / 부산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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