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캄보디아 정착 이야기

'좌충우돌' 캄보디아 정착 이야기

[ 땅끝편지 ] 캄보디아 오태근 선교사편(2)

오태근 선교사
2024년 04월 25일(목) 14:22
캄보디아 선교 초기 네 가족의 행복한 교통수단이 되어준 오토바이.
2000년 6월 5일 늦은 밤 방콕 공항에 도착해 다음날 아침까지 우리 네 식구는 가방을 움켜쥐고 공항 대합실 의자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밤새 많은 생각으로 몸은 피곤했으나 이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캄보디아에 들어간다는 사실 때문에 설렘과 기대감으로 아침 비행기를 타고 프놈펜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제 우리는 선교지에 일주일간 머무는 비전 트립팀이 아니라 선교지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마음을 가져서 인지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프놈펜이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프놈펜 공항에는 예장 통합 선교사회 지부 선배 선교사님들이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거할 셋집을 얻을 때까지 서병도 목사님이 시무하는 프놈펜 한인교회에서 머물기로 했다. 교회 사택 2층의 작은 방 한 칸에서 두 주 이상을 지냈는데 막 우기가 시작 되는 시기라서 무척 무덥고 습한 날씨가 계속 됐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한 대의 선풍기 앞에 네 식구가 앉아서 달려드는 모기를 쫓아내며 몸이 조금씩 힘들어갈 즈음인 닷새가 되는 날 저녁이었다.

그동안 조금씩 우울해 하던 둘째 찬영이(당시 초4)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 나 한국에 가고 싶어. 친구들도 보고 싶고 할머니도 보고싶어".

그러자 아내 이세금 선교사가 아들을 달랜다. "너희 엄마는 어디있니? 그러면 나의 엄마인 할머니는 어디에 계시지? 엄마가 더 할머니가 보고싶지." 그러다가 모자가 부둥켜 안고 함께 통곡을 한다.

그렇게 현지 생활에 눈물로 적응하고 자란 아들이 현재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 한인교회에서 지낸 지 거의 석 주만에 값싼 월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3층 집이었고 우리는 2층에 세를 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1층에서 3층까지 통로가 하나였다. 1층 주인집 거실과 방을 통과해서 우리 집 2층, 그리고 3층에는 프랑스 사람이 세를 살았다. 세 가족의 삶이 너무 공개적이었다. 처음에는 불편했다. 가족끼리 큰 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늘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원치않던 공동생활에 조금씩 적응을 해 가니 오히려 매일매일이 재미있어졌다. 식사 때가되면 주인집에서는 쿠리한 캄보디아 젓갈 냄새가 진동하고 우리 집에서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그리고 윗층에서는 스파게티 냄새가 어우러지는 한 지붕 세 가족, 우리들의 캄보디아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시작이 됐다.

교통수단으로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한국에서는 오토바이를 탈 기회가 없었으나 선교지에서는 필수사항이다. 오토바이 한 대로 아내와 시장도 가야 하고, 아이들 등·하교 픽업도 해야했다. 오토바이 한 대에 4식구가 끼어 타고 외출을 하면 현지인들이 무척 신기해하며 미소를 지어주고 어떤 사람들은 작은 아들의 아직은 하얀 팔을 만져보기도 하며 친밀감을 보여준다. 우리도 함께 웃어주며 한 마디 건넨다.

"쁘레아 예쑤 쓰로란 네악(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선교지에서 살아야하는 선교사의 장벽중 하나가 바로 그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다. 캄보디아 조상들은 후손에게 크메르어를 만들어서 물려주었다. 캄보디아 역사의 시작은 인도의 카운디나 왕자가 세운 크메르 건국신화에 따른다. 인도의 브라만 계급 출신인 카운디나 왕자가 배를 타고 이 땅에 와서 니기니 뱀 신과 결혼하여 후손을 이루었고, 고대 앙코르 제국의 영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캄보디아의 고대 사원의 지붕, 계단 그리고 현재 국회 의사당이나 관공서의 지붕 기와 끝 부분에는 뱀 꼬리로 마무리 장식을 하며 수호신의 역할을 기원한다. 크메르어는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를 가져다가 자체 문자로 개발하였는데 글씨의 끝 부분이 뱀 꼬리 모양이다. 크메르어는33개의 자음과 23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져있는 배우기에 무척 곤혹스러운 글자이다.

크메르어 공부를 위해서 오전에는 프놈펜 대학 부설 언어학과에서 크메르어 기초를, 오후에는 두 명의 가정교사와 각각 기초 크메르어와 성경으로 언어공부를 시작했다. 약 2년간 크메르어와의 씨름을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이 기간이 선교사로서 가장 힘들기도 했고, 또한 언어를 습득해가는 과정에서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태근 목사 / 총회 파송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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