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편견 극복한 희망전도사, 故 강영우박사의 마지막 고백

장애와 편견 극복한 희망전도사, 故 강영우박사의 마지막 고백

[ 아름다운세상 ] "두 눈은 잃었지만 그 분께 받은 복은 넘쳤습니다"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2년 03월 05일(월) 17:52
"하나님의 축복으로 저는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실명(失明)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들을 이루어내셨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가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두 눈도,부모도,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입니다.…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아름다운 인연들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많아 봉사를 결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강연들도 하게 됐습니다. 두 눈을 잃고 저는 한 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지난달 23일 세상을 떠난 고 강영우박사가 의사로부터 췌장암 진단을 받고 지인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중 한 구절이다.
 
   
사진/두란노 제공
시각장애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백악관 차관보를 역임한 강영우박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장애와 편견을 극복한 인간승리는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전할 것이다.
 
그가 성장한 1940~1960년대 한국은 장애인에 대한 인권과 배려가 거의 없이 오히려 차별과 멸시가 존재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한계단 한계단을 오를 때마다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성공적인 삶은 더욱 가치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그는 미국 내에서 장애인이며,소수 민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미국 연방정부 최고 공직자의 자리에 올라 미국 주류사회에서도 부러워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의 목적이 세상적인 성공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그는 고위공직의 자리에서도 장애인 인권과 복음증거를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큰 울림이 되고 있다.
 
 
# 실명과 가족들의 잇따른 죽음
 
 
1958년 5월. 중학교 3학년이던 그는 축구를 하던 중 공을 맞아 '망막 박리'라는 진단을 받고 실명을 했다. 시력을 잃은 것만도 감당하기 힘든 시련인데 아들이 시각장애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의 홀어머니는 그 충격에 8시간만에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18세 누나는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평화시장 의류공장에서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다. 결국 열세살짜리 남동생은 철물점에서 먹고 자는 점원이 됐고,아홉살 여동생은 고아원으로,강영우는 맹인 재활 기관으로 세 남매는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 상황에 대해 강 박사는 얼마 전 그의 아들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눈먼 고아로 어린 동생 둘과 세상에 남겨졌던 나에게 지금과 같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 얘기했다면 나는 아마도 거짓말을 해도 좀 믿을 수 있게 하라고 화를 냈을 것이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또래보다 5년이나 늦게 맹학교에 입학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들은 모두 안마사나 점쟁이가 되라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교육학 전문가가 될,불가능할 것만 같은 꿈을 꾸었다. 이를 위해 낮에는 맹학교에서 안마 등을 배우고 저녁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꿈은 아름답고 영롱하게 빛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학원을 다니다가 웅덩이에 빠져 부상을 입기도 하고,눈 먼 사람이라 재수 없다고 버스 차장이 밀쳐내 버스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연세대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할 때도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다. 미국 유학을 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유학을 추진하던 1972년 당시에는 '장애인은 유학할 수 없다'는,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법 조항이 있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심리학 석사와 교육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된 후에도 그의 앞길을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로 금의환향할 꿈에 부풀어 있던 그를 고국에서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학생 비자는 만료되고,생활비로 나오던 장학금도 중단되기도 했다. 어린 아들까지 둘이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길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열렸다. 미국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학교수로 발령을 받고,2001년에는 미국에서 대통령 임명,상원 인준을 거치는 고위 공직자 5백명 중 한 명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에 임명,11년간 최고위 공직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외에도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루스벨트 재단 고문 등을 역임하며 장애인의 권리 증진을 위해 힘썼다.
 
이후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마지막 시련이 닥쳤다. 지난해 10월 췌장암이 발견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 그러나 이러한 사형선고 속에서도 그는 오히려 지금까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하며,지난 1월에는 국제로터리 재단 평화센터 평화장학금으로 25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또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장애인 인권개선을 위한 마지막 저서를 집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거목다운 마무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유고작은 3월 중 두란노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청천벽력 같은 시한부 판정에도 조용하고 온유하게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그의 모습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세상은 강영우라는 한 인간을 잔인할 정도로 고난의 나락으로 밀어넣었지만 신앙인 강영우는 절대긍정의 힘으로 그 고난을 발판으로 삼아 한 단계 한 단계 인생의 계단을 올라갔고 결국 모든 이들의 축복과 애도 속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다음은 그가 사는 동안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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