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해방되지 못한 원폭피해자들...대물림 고통

아직도 해방되지 못한 원폭피해자들...대물림 고통

[ 기획 ] <광복70년특별기획>한일 원폭피해자들간의 만남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5년 12월 01일(화) 10:38
   

지난 9월 서울 종로 평화박물관 내 스페이스99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원폭피해 2세간의 의미 있는 만남이 성사됐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아직도 지독한 후유증과 국가의 외면이라는 이중고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원폭피해자 1, 2세 및 가족들이 일본의 원폭피해 2세들과 만나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핵 없는 세상과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모임에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서울지부장 원정부 씨, 한국인원폭2세 환우회 고문 김봉대 씨, 한국인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 한정순 씨가 참여했으며, 일본에서는 히로시마현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 사무국 차장 오나카 신이치와 일본 히로시마현 피폭 2, 3세 모임의 이사 나가하라 토미아키 씨가 함께 했다.
 
1990년 한일 양 정부는 일본 피폭자원호법에 준해 한국인 1세 피폭자 중 '히바쿠샤(피폭자)' 검증에 통과한 이들을 대상으로 의료비 지원을 결의한 바 있어 1세들은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왔지만 2세들은 유전적인 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더 앞서서는 원폭피해자 2세인 고 김형률 씨가 지난 2002년 공개적으로 커밍 아웃하면서 세상은 이들의 존재를 겨우 알게 되었을 정도로 일반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도 마찬가지. 오나카 신이치 씨는 "원폭 피해 1세들에게는 정부의 조치가 치밀하게 잘 이뤄지고 있지만 2세들에게는 1년에 1회 기본적인 건강진단만 제공하고 있다"며 "2세들도 암발병률이 늘고 있어 철저한 건강검진이 필요한데 정부는 2세들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더해 47개 현에 피폭자 모임이 조직될 정도로 활발했던 2세 환우들의 운동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약해져 정부를 향해 제대로 주장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양국 모두 원폭피해 2세들의 상황은 암울했지만 이날 이들의 만남 직전에는 기쁜 소식이 전달됐다. 만남이 있었던 지난 9월 8일 일본 사법부가 일본 정부에게 한국에 사는 원폭 피해자에게도 치료비를 전액 지급하라는 판결을 사상 처음으로 내려졌기 때문. 이러한 기쁜 소식에도 불구하고 한명 한명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다시 분위기는 무겁고 어두워졌다.
 
이들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날에 대한 기억을 생생히 하고 있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서울지부장 원정부 씨(78세)는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날 7살로 초등학교에 3개월째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미쓰비시 도크 건설 현장에서 돌을 쌓는 일을 했는데 1945년 8월 6일 아침 불빛이 번쩍이더니 집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지붕이 무너지자 어린 손주들을 구하겠다고 할머니가 천장을 막았는데 할머니가 깔리셔서 팔목이 부러지셨죠. 나가보니 온 동네가 다 무너졌어요. 히로시마에서 1.5km 떨어진 곳이었죠. 원폭구름이 햇빛을 가려 깜깜했어요. 아버지가 걱정되어 시내로 나갔더니 철도가 엿가락처럼 휘어있었고,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어요. 어머니는 타죽어가는 사람들도 봤다고 하셨어요. 결국 아버지를 찾지 못해 망연자실해 있는데 5일만에 돌아오셨어요. 일본인들이 강제로 시체를 치우게 했는데 가족이 걱정되어 5일만에 도망쳐 오셨다고 하셨죠."
 
참가자들은 자연스럽게 부모들의 이야기에서 2세들의 이야기로 옮겨졌다.
 
국내 최초의 원폭피해 2세 운동을 펼친 고 김형률 씨의 아버지 김봉대 씨는 먼저 떠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하며, 이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너무 부족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들 형률이가 그렇게 아프면서도 4년간 자기의 몸을 바쳤다 해도 과언 아닐 정도로 인권 운동을 했어요. 아픈 몸을 이끌고, 보사부, 국회, 언론사를 다니며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35세 꽃다운 나이에 채 펴보지도 못한채 세상을 떠났지요. 형률이가 떠난 뒤에 부모로서 형률이가 못다한 일을 다하기 위해 일선에 나습니섰다. 올해 4월 23일 유엔본부에서 강연을 했어요. 160개국에서 사람들이 왔는데 한국인도 피폭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김봉대 씨의 증언대로 일본의 원폭피해자는 70만여 명이었고, 그중 10%인 7만여 명이 조선인이었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최근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쳐 온 한국인원폭2세환우회 명예회장 한정순 씨 또한, 원폭피해 2세로서 말로는 다 표현 못할 고난을 겪어왔다. 한정순 씨는 본인도 15세 때부터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으로 양 다리에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고, 세번째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원폭 피해는 3대인 한 씨의 아들에게도 이어져 더 큰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부모님이 원해서 피폭자가 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장애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세상과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야 했고, 몸도 너무 아파서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내 몸 아픈 것보다는 뻣뻣하게 굳어져 가는 뇌성마비 아들을 만질 때는 그 아픔이 두배 세배 깊습니다. 환우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우리 2세 환우의 상황은 1세가 피폭 당해 죽어가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건강했다가 자라면서 질병을 얻는 사람이 많고. 정신이상, 다운증후군도 많습니다."
 
일본 히로시마현 피폭 2, 3세 모임 이사 나가하라 토미아키 씨는 원폭 이듬해인 1946년에 태어나 곧바로 폐렴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왼쪽 청력을 잃었으며, 그 이후에도 결핵에 걸리는 등 계속해서 병약했다고 증언했다. 현재 나가하라 씨는 히로시마 시에 견학을 오는 어린이들에게 원폭피해 실상을 알리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특히 히로시마 평화추모공원 내 한국인 위령비 앞에서 한국인들도 원폭피해를 입었으며, 일본이 한국에 38년간 많은 피해를 입혔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고 말했다.
 
한ㆍ일 양국에서 모인 원폭피해 2세들의 바람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2세, 3세로 유전되는 원폭병의 피해를 정부가 직시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대량학살과 대물림의 고통을 야기하는 핵무기가 이 땅 가운데 사라지는 것, 이 두가지 바람뿐이다.
 
이날 간담회 후 기자와 대화를 나눈 원폭피해 2세들은 한국의 교회들이 사회적 약자인 원폭피해 2세에 관심을 갖고, 핵 없는 세상과 평화 정착을 위해 기도와 관심을 표현해달라고 부탁했다.

 

#원폭피해자들 위해 앞장서 온 한국교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한국교회희망봉사단 등

한국인 원폭피해 문제는 최근 2세와 3세에까지 그 유전적 영향력이 미칠 정도로 그 피해가 막심하지만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나마 한국교회가 원폭피해자들을 위한 인권운동 분야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해오지 않았다면 이 문제는 더 깊은 침묵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다.
 
아무도 원폭피해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1974년부터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최초로 원폭 피해자 지원 활동에 관심을 갖고, 피폭자들에 대한 치료와 가족생계 지원, 치료 및 보상 대책 요구, 일본 보상촉구활동, 대정부 법률개정활동 등을 펼쳐왔다.
 
역사학자인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원폭피해자 문제에 초기부터 관심을 갖고 운동을 벌여오지 않았더라면 이 문제가 아예 묻혀버렸을지도 모를지도 모른다"며 한국교회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칭송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희망봉사단도 원폭피해 2세들에 대한 지원과 함께 지난 2013년에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르포 '핵, 끝나지 않은 형벌(박동수/한들출판사)'을 발간했으며,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전방위적으로 많은 노력을 펼쳐왔다.
 
본교단 사회봉사부도 2013년 6월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추진연대회의'에 후원금 100만원을 전달하는 등 관심의 끈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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