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승원 목사, 섬김과 화해 중재의 본이 되다

손승원 목사, 섬김과 화해 중재의 본이 되다

[ 기획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9년 12월 02일(월) 03:19
'오직 선교'를 위해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함께 걸어온 손승원 목사와 정금자 사모.
새벽녘 고요한 적막을 가르는 종소리에 위로를 받던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여읜 소년이 슬픔을 달래주던 종소리에 이끌려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교회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 제발로 찾아간 교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다. 훗날 그는 섬김과 청빈, 화해 중재의 삶으로 존경받는 목회자가 됐다.

울산제일교회에서 정년은퇴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고문선교사로 러시아 모스크바장신대 총장을 역임한 손승원 목사(울산노회 공로)의 간증이다.

손 목사는 1936년 경북 군위에서 4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한의사 부친을 둔 넉넉한 형편의 가정이었다.

부친의 별세 이후 결신한 손 목사는 가족과 친구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어린 나이가 무색하게도 주변에 가난하고 병약한 친구들에게 자기 것을 나눠주고 도우면서 주일학교로 인도하며, 삶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손 목사가 회상한 청소년기는 '왕초'였다.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고, 싸움도 잘했다. 불의를 참지 못한 성격으로 못된짓을 일삼던 또래는 지역 씨름대회 1등의 실력으로 내다꽂았다.

계명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야간중학교 교사로 학생을 가르쳤던 손 목사가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진학하며 주의 종으로 부름받은 계기에 사연이 있다. 말 뒷발에 차여 생사를 넘나들던 과정에서 소명을 받았다.

"말에 차여 다친 곳이 몇년 동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아팠어요. 죽을 생각으로 산에 올랐다가 계곡물을 마시며 갑자기 들었던 깨우침이 '어떻게든 살아서 주님의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손승원 목사의 직계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슬하 1남 1녀의 가족은 든든한 선교동역자들이다.
목사고시를 치를 무렵에는 선교를 향한 동일한 분량의 열정을 가진 부인 정금자 사모를 만났다. 부부는 '오직 선교'를 위한 여정이 고될지라도 숙명처럼 그 길을 나란히 걸어갔다.

정금자 사모는 행동하고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전국교역자부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고, 모스크바장신대에서 목회학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왕성한 활동력이 있지만 목회 내조는 조용하고 사려깊다.

부부는 슬하에 1남 1녀가 있다. 아들 손수호 씨는 내과 전문의로 '여호와 라파'를 증거하고, 딸 손수정 씨는 부모의 선교사역을 물질과 기도로 묵묵히 돕고 있다.

손승원 목사는 '불려다니는 목회'를 해왔다. 안정적인 목양지에 있어도 어디선가 그의 손길과 도움을 필요로 하면 '주님 가라시는 길'로 알고 순종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대구남신교회 담임으로 있을 때는 미션스쿨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남성여고 교목, 경성대 교목실장(교수 겸직), 영남신학대 학장으로 목양지를 옮겼다. 고난의 길이 예상되어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구중앙교회와 포항북부교회를 거쳐 울산제일교회에 부임할 때도 스스로 이력서를 써서 옮긴 적이 없다. 피스메이커로서의 손 목사를 간절히 원했다.

손 목사를 오랜 기간 알아온 이들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려 언제나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희생해왔다"고 평가한다. 손 목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충성하며 헌신했다.

미션스쿨 교목을 맡던 젊은 시절의 손승원 목사. 손 목사는 평생을 주님께 순종하는 '불려다니는 목회'를 해왔다.
분쟁과 다툼의 현장에서 '소방수'로도 활약했다. 사람들은 그를 '평화의 중재자'로 애타게 찾았다.

영남신학대가 내분으로 폐교 위기에 몰렸을 때 학장으로 부임하며 화합을 이끌었고, 울산교계가 나눠지려 할 때도 갈등을 겪던 쌍방을 화해시키고 하나로 만들었다.

손 목사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윤리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며 "우리는 예수님의 고차원적인 형이상학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모방할 때 그 사랑의 몇 프로라도 실천할 수 있게 된다"고 전했다.

'사랑의 산울림'은 그의 인생철학이다. 손 목사는 "주는 것이 받는 것이란 말과 같이, 사랑의 산울림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랑할 때만이 사랑의 응답을 준다. 예수님의 사랑의 영이 내 안에 존재할 때 우리는 사랑의 사람으로 현존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나보다는 남을 높게 여기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랑을 전한 그의 성품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그는 대화를 나누는 상대의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절대 하대를 하지 않았다. 존중받아야 할 동등한 인격체로 봤다.

손 목사의 한 후배 목회자는 "손 목사님과 교회에서 가끔 중화요리집에 자장면을 시켜먹으면, 배달원에게 항상 '선생님, 수고많으셨습니다'라는 공손한 인사를 하셨다"는 일화를 전했다.

미국 맥코믹신학교에서 함께 수학한 한 목회자는 "손 목사님은 추위에 유난히 약하던 인도 학생에게 한벌 있던 외투를 벗어주고 본인은 내복을 겹겹이 껴입으며 겨울을 버텼다"고 추억담을 꺼냈다.

손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도 두루 쓰임을 받았다. 고시부장, 교육부장, 신학교육부장, 전도부장, 세계선교부장, 기독교대학연구위원장, 성서신학협의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이사장을 지내면서는 모금 운동으로 건실한 기반이 세워지도록 했다.

총회장 도전에 대한 주변의 숱한 권유는 고사했다. 그는 "지금의 자리에서 섬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 그가 '달려갈 길 마쳤다'고 여길만한 정년은퇴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세계선교부 고문선교사로 임명받아 모스크바장신대 총장으로 9년간 활동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손 목사 부부는 학교 기숙사의 조그만 방에서 지냈다. 손 목사는 총장이면서 강의도 하며 무보수로 사역했다. 사재를 털고 자녀들이 정기적으로 보낸 선교후원금을 학교재정에 보탰다.

손 목사는 "러시아에서 4년만 선교한다는게 9년 세월이 흘렀다. 아내가 많이 고생했다. 언어가 어렵고 아는 사람도 없어 아내가 학교 밖으로 잘 나가지 못했다. 아내는 방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지낸 시간이 많았다"고 러시아에서의 생활을 회고했다.

손 목사가 총장을 맡으며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다. 손 목사를 존경하던 제자들과 후배들은 선교동역자로 발 벗고 나섰다.

손승원 목사는 러시아 모스크바장신대 총장을 역임하며 차세대 기독교 인재들을 키웠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0회 총회는 손 목사에게 세계선교 부문 공로상을 수여했다. 총회는 공로에 대해, "학교 발전과 인재 양성을 통해 러시아 선교에 헌신했다"고 밝혔다.

최근 근황으로는 전국은퇴목사회 회장을 지냈으며, 울산제일교회 은퇴 13년만인 올해 12월 말 원로로 추대받게 됐다. 은퇴 당시 원로자격 조건이 몇 개월 모자란 상태로 정년을 맞았는데, 울산제일교회가 시무 당시의 공로에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원로 추대를 결의했다.

현재 손 목사는 울산에서 거주하고 있다. 재산이라고는 살고 있는 집이 전부다. 부부가 나누고 퍼주는 성격이라 모아놓은 것도 없다.

인터뷰를 마치며 신앙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울림은 깊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고난이 주어질 때 서두르지도 말고, 쉬지도 말아야 합니다. 운명의 폭풍을 꾸준히 견디면 투쟁의 모든 날이 지난 후에 역사 위에 찬란한 면류관으로 빛날 것입니다."

신동하 기자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