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사도행전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사도행전 5:1~11)

[ 설교를위한성서읽기 ] 4

이승호 교수
2022년 09월 14일(수) 06:43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는 성령의 역사로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러한 부흥은 아무런 장애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외부적으로는 유대 지도자들의 박해(4:1~22; 5:17~42)와 내부적으로는 부정직의 행위(5:1~11) 및 행정적인 문제(6:1~7)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낸 결과이다. 5:1~11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는 기독교 공동체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이 단락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매우 난감하며 이해하기 힘든 본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과연 이 부부가 저지른 잘못이 죽음의 징계를 받을 만큼 그렇게 중대한 죄일까?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는 이 본문을 누가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누가는 사건의 경위는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고 오히려 그 의미와 결과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이상적인 공동생활과 직접 관련된다. 행 4:32~37은 성령으로 충만한 가족 공동체로서의 예루살렘 공동체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2:44~45 참조). 이러한 공동체 생활상에 있어 바나바의 모범적인 헌신이 긍정적인 모델이었다면(4:36~37),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부정적인 모델로 나타난다(헬라어 본문 5:1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통해 두 이야기의 대조를 표시한다). 누가는 이 두 사례를 나란히 대조시킴으로써 격려와 경고라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위는 1) 함께 소유(땅)를 팔아 2) 그 값에 얼마를 감추어 3)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으로 간략하게 서술된다(1~2절). 베드로의 지적에 따르면 땅값의 얼마는 감추고 나머지를 바친 이 행위는 단순히 거짓이나 부정직의 차원을 넘어 "사탄이 마음에 가득하여" 저지른 행위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속인" 행위요(3절), "하나님을 속인" 행위이다(5절). 이러한 지적은 잘못을 저지른 개인의 차원을 넘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공동체의 차원에서 본문의 논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감추다"(2, 3절)로 번역된 헬라어 노스피조마이(nosphizomai)는 70인역 수 7:1에서 아간이 지은 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와 동일하다. 이런 의미에서 학자들은 대부분 이 이야기를 아간의 이야기와 하나의 짝을 이루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구약에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아간이 저지른 부정을 제거하고 나서야 계속해서 승리에 찬 전진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신약에서도 기독교 공동체가 새롭게 시작되는 과정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정을 제거한 후에야 지속적인 성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나니나와 삽비라 사건은 기독교 공동체의 순결과 거룩성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전 5:5~8, 13; 고전 12:30~32 참조).

땅을 팔든지 팔지 않든지 그리고 판값의 얼마를 바치든지 하는 것이 주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베드로의 말을 고려할 때(4절), 아나니아는 땅을 판 값의 일부를 바치고는 전부라고 가장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8절 참조). 그렇게 한 이유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보이려는 명예와 칭송의 욕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마 6:1~2, 5, 16 참조). 그렇다면, 아나니아의 행위는 잘못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께서 경고하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는 두 마음의 태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눅 16:13; 약 4:4 참조). 이러한 동기는 재산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성령 충만(자기 비움)이 아니라 시기, 위선, 재물욕 그리고 자기를 높이려는 명예욕을 특징으로 하는 사탄의 지배(3절)를 드러낼뿐이다(눅 22:3~6의 가룟 유다의 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성령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아나니아가 죽은 후 삽비라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삽비라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7~10절).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느냐"(9절)라는 베드로의 질책은 잘못이 들통나지 않고 끝까지 숨길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경종을 울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크게 두려워했다는 사람들의 반응(5, 11절)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기독교 공동체는 동기와 행위가 거룩해야 한다. 거룩함이 공동체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 역시 세상의 기준과 기대를 넘어서는 더 높은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승호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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